5.18 광주 민주화운동 무기고 습격 사건 진실에 대한 개인적 추측

5.18 광주 민주화운동 무기고 습격 사건 진실에 대한 개인적 추측


1. 한국의 민주화 운동에서 오직 5.18만 유독 논란
- 다른 민주화 운동에 대해서는 보수, 진보, 좌파, 우파 모두 딱히 논란까지는 되지 않는다.

2. 5.18만 논란인 이유는 5.18만이 '무기고 습격을 통한 시민군 조직'이라는 특이 사항이 존재하기 때문
- 한국전쟁 이후 현재까지 모든 사례를 다 들춰봐도 '무기고 습격을 통한 시민군 조직'은 오직 5.18만 유일하다.

3. 분단국가 한국 현실에서 '무기고 습격=내전 선포=자살 행위'

4. 즉 '무기고 습격 후 시민군 조직'이란 아예 있을 수 없는 일. 일반적인 상식 범위를 벗어난 수준 정도의 문제도 아니고 진짜 '집단 자살'급 문제
- 즉, 분단국가 한국 상황에서 아무리 극단적 상황이라 해도 무기고 습격 후 시민군 조직이란 선택지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아예 차원이 다른 문제다.

5. 또한 한국전쟁 이후 한국사 통틀어서 무장이 필요하면 차라리 자체 제작해서 사제 총기 및 그에 준하는 무기를 만들면 만들었지, 군을 공격하려 하지 않음

6. 이는 어떤 식으로든 병역을 이행한 자라면 철저히 교육받아 생긴 본능적 선택이기 때문
- 무기고 습격은 고사하고 무장탈영 한 명만 발생하도 전국이 뒤집히고 광범위한 지역의 군부대가 총동원되다시피 한다. 무기고 습격은 사실상 내전 선포이며 자살 행위란 건 분단국가 한국의 한국인에게는 상식 축에도 못 끼는 너무나 당연한 생존 본능과 관련된 조건반사라 봐야 할 지경이다.

7. 한편, 정작 무기고 습격 및 시민군 조직 이후에는 전혀 조직화된 군사 집단 모습을 못 보여줌. 오히려 전형적인 한국식 민간 시위 형태 중 하나인 특정 거점 점거 형태
- 즉, 무기고 습격의 의미를 몰랐을 리 없는 시민군 조직이 전술적 심각한 미비를 보인다.
- 광주 시민들 중 병역 의무를 수행한 사람들이 당연히 수두룩할 텐데 모든 시민들이 미필이었다는 것 외에는 말도 안 되는 일이 정말 벌어졌다.

8. 이로 미루어 보면 5.18의 논란의 중심인 '무기고 습격'의 이상한 점이 더욱 두드러짐
- 무기고 습격과 그 이후 전개를 보면 아예 이해할 수 없다.

9. 북한의 개입은 실제 역사적 전개 자체만으로도 완벽히 부정됨. 도시 주요 거점 및 요충지 점거 및 향후 소규모 빨치산화를 위한 무기 분산 등이 안 나타남
- 충분히 무력 방어 가능한 해방구 건설을 위한 도시 주요 거점과 시설, 요충지 점거라는 기본 전술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극히 '상징적 장소에 대한 집착'이라는 조직화되지 못한 모습이 나타난다.
- 전남 각 지역으로 퍼져서 무기고를 습격한 후 다시 광주로 집결하는 전략적 차원에서만 보면 심각하게 어리석은 짓이 일어난다. 만약 진짜 북한이 개입했다면 최소한 각지에서 지속 가능한 저항 기반을 만들며 전선 확장을 요구했을 것이다. 오히려 이래야 전선이 크게 확장되며 광주로의 단일 압박이 완화되고 더 큰 규모의 군대 동원이 필연적이게 되기 때문이다.
- 또한 무기의 은닉 등 실패 시 향후 아지트 건설 및 빨치산 투쟁을 고려한 움직임 역시 나타나지 않는다.

10. 이로 미뤄봤을 때 계획적 습격이라 보기도 어렵다는 문제가 생김

11. 그렇다면 누군가 질적 비약 (무기고 습격을 통한 극단적 무장 강화)을 시키는 것과 동시에 이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야 한다는 문제가 발생

12. 소수의 비군사 고정간첩들이 당시 극단적 분노와 극단적 혼란 속에서 생존 투쟁으로 무기고 습격을 선동하고 주도

13. 그러나 이들은 소수였던 데다, 5.18 참여자 절대 다수는 친미 반북으로 이들과 성향이 반대였음

14. 비군사 고정간첩들 역시 북한의 지령을 받고 일으킨 것이 아니라 상황 보고 자의적, 거의 즉흥적으로 판단을 내린 것이었음. 즉 이들도 '준비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습격 성공 후 무엇을 해야 할지 확실하지 않았음 (특히 지리산 빨치산 등은 이미 역사적으로 완전히 실패했음이 드러났기 때문에 시민군 이후 전술적으로 무엇을 해야 할 지 본인들조차 갈피를 제대로 못 잡았을 수도 있음)
- 만약 조금이라도 계획이 있었다면 최소한 전라남도 각 지역 무기고 습격 후 거기에서 전선을 조직해 전선 확장을 획책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 역시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무기 습득 후 광주로 집결하는 군사적으로 보면 치명적인 실책을 저지른다. 소수였다고 보면, 그리고 주도 인물들이 아니었다고 본다면 전남 각 지역에서 무기고를 습격해 무기를 탈취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장 봉기를 일으킨다는 계획의 실행은 무리였을 것이다.
- 즉, 그 규모는 10~20명 수준이었을 것이다. 선동꾼, 몰이꾼 조직 역할은 가능하나, 에너지가 폭발한 군중을 통제할 수 있는 인원은 아니었을 것이다.
- 이들은 군중에 일반인처럼 섞여 있었으며,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주도하는 세력은 아니었을 것이다. 만약 주도하는 세력 중 누구였거나 유독 눈에 띄는 인물들이었다면 어떤 식으로든 신원이 이후 밝혀졌을 것이며, 연쇄적으로 전부 드러났을 것이기 때문이다.
- 또한 이 정도라면 이후 전개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게 가능한 수준이다.

15. 한편, 신군부는 '무기고 습격=내전 선포'로 인지, 즉시 선택지는 즉각 신속 유혈 무력 진압 선택지만 남음

16. 그렇지만 무기고 습격 및 시민군 결성이라는 상황과 전남 각지에서 벌어진 무기고 습격 이후 광주로의 집결은 전술, 전략적으로 일반적 상황과 다른 모순이었기 때문에 여기에서 혼란 - 며칠의 시간이 발생했을 것임
- 무기고 습격 및 시민군 결성은 희대의 대사건으로, 내전 발발이기 때문에 즉각 극단적으로 무력 진압하는 게 맞았다.
- 하지만 북한의 지시를 받고 일어난 일이라면 전남 각지에서 봉기를 일으키며 전선 확대에 나서야 할 것이으나, 오히려 광주로 집결해 스스로 독 안에 든 쥐 꼴을 자처했다.

17. 이로 인해 소수 비군사 고정간첩들은 조직 장악 시간은 고사하고 역사에서 흔히 보이는 패턴인 소수의 저항조직 대원 포섭할 시간도 없었음
- 22일부터 자발적 무기 반납 등 소수 비군사 고정간첩들이 원하던 내전 상황 그림과는 완전히 다르게 상황이 돌아갔다.
- 또한 광주 시민들이 이들과 정반대인 친미 반북 성향이었음은 실제 역사에서도 확실히 확인되는 점이다.

18. 이렇게 이들은 아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림 (무기고 습격하자고 주장한 '아무개'로만 남음. '아무개'=미상의 인물들)
- 22일부터 자발적 무기 반납에서 1차적 좌절, 그리고 25일에 미국 7함대 소속 코럴시호(USS Coral Sea) 항공모함 소식에 열광하는 모습에 완벽한 실패를 인정했을 것이다.
- 이때 이들을 완벽히 버리기로 판단했을 것이다. 시민군 형성 이전부터 상당히 잔혹했던 시위 진압 과정에 무기고 습격의 함의를 떠올렸을 때 이후 어떤 일이 벌어질 지 너무나 쉽게 예측할 수 있는 일이었다.
- 이 상황에서 벌어질 일이라고는 신군부 측의 내전에 준하는 폭력 진압과 무의미한 저항 뿐이니 자기들끼리 싸우고 죽으라고 버리고 도망쳤을 것이다.
- 하지만 22일부터 벌어진 자발적 무기 반납 상황을 보며 그 사이에 무기 반납을 하며 자연스럽게 빠져나갔을 수도 있다. 무기 반납 거부에 대한 의심하는 분위기가 없지 않았던 점 또한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에 오히려 25일 이전에 간곡한 부탁에 마지못해 무기 반납하는 형태로 빠져나갔을 수도 있다. (애초에 무기 반납이 이뤄진다는 사실은 이들 입장에서 이 투쟁의 결과가 명백한 실패로 귀결될 거라 쉽게 판단 가능했을 것이다)
- 이렇게 본다면 23~24일 중에 마지못해 무기 반납하는 모습으로 이탈했으며, 25일까지는 주변에 남아 있었으며, 25일 미국 7함대 소속 코럴시호 항공모함 소식에 완전 현장 이탈했을 거라 추측해볼 수 있다.

19. 무기고 습격을 선동하고 성공시켰던 소수의 비군사 고정간첩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꼴이 되자 '무기고 습격이 왜 일어났는지'에 대해 미스테리로 남음

20. 이렇게 본다면 5.18 옹호론자들 입장에서 만약 소수 비군사 고정간첩 선동설을 받아들인다면 수많은 광주 시민들이 간첩들 농간에 놀아난 꼴이 됨

21. 이렇게 본다면 5.18 비난론자들 입장에서도 사실상 소수 비군사 고정간첩들에 놀아난 꼴이 됨

22. 그러므로 한국 사회에서 현재 받아들여질 수 없음

23. 그러나 '소수 비군사 고정간첩들의 선동'으로 무기고 습격이 일어났다고 본다면 5.18 최대 미스테리인 무기고 습격과 그 이후의 전개, 그리고 오늘날까지의 논란과 미스테리가 단일 변수로 모두 설명됨
- 신군부는 무기고 습격을 간첩 주동이라고 주장했으나 끝내 무기고 습격 주동자들을 제대로 못 잡았음
- 당시 가담자들 역시 무기고 습격 선동자, 주동자를 정확히 답하지 못함
- 시대가 바뀌어서 5.18 경력이 오히려 자랑스러운 시대가 되고 혜택, 특권을 받는 시대인데도 오히려 안 밝혀짐
- 이는 철저히 신분을 숨겨야 하는 사람들이자 당시 순수한 광주 시민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음

24. 또한 이렇게 본다면 5.18은 한국 역사상 가장 황당한 비극이 됨 (광주 시민들도, 신군부도 모두 소수 비군사 고정간첩 농간질에 완벽히 놀아나며 피동적으로 극단적 충돌 및 비극으로 빠져버린 셈)

이 추측에 맞춰서 재구성해본 5.18 광주 민주화운동 전개 및 그 이후


1. 약 20명 규모의 광주-전남 고정간첩단은 북한으로 지령을 받지 못한 채 광주에서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2. 중요한 점은 이들이 시위를 주도하는 세력 (5.18 민주화운동 주도 세력들)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3. 신군부는 최대한 빨리 광주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특전사까지 투입해 초과잉 폭력 진압을 진행중이었다.

4. 이로 인해 광주 시민들은 극도의 공포, 분노, 혼란 속에 빠진 상태였다.

5. 이들 비군사 고정간첩단은 북한의 지령이 없는 상황에서 광주 시민들의 극도의 공포, 분노, 혼란을 이용해 혁명을 일으킬 계획을 세웠다. 단,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것에 비해 북한의 지령이 없었기 때문에 자기들끼리 급히 계획을 세웠을 것이다.

6. 이들 고정간첩단은 자신들의 계획에 대해 확신이 없는 상태였다. 한반도 유사시 후방 교란을 위한 작계는 있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전시 상황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광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은 자신들이 주도한 봉기도 아니었고, 평화시위에서 갑자기 급격히 유혈사태로 전환되고 있었으며, 결정적으로 시위대는 자신들의 목표 및 성향과 정반대인 "친미 반북"이었다. 이 평화 시위를 반미 친북 무장 투쟁으로 성격을 전환시키고 주도권을 장악하는 계획은 전혀 없었다. 더욱이 북한에서 지령을 받은 것도 없으니 더욱 조심스러웠다.

7. 5월 20일 시위대가 광주 세무서를 습격하고 예비군 무기고에서 카빈 소총 17정을 탈취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a. 이 사건은 감정이 격해진 시위대가 우발적으로 일으킨 사건일 수 있다.
b. 하지만 고정간첩단이 상황이 계획을 실행할 만한지 시험해보기 위해 - 시위대가 어느 정도로 흥분하고 쉽게 선동되는지 여기에서 일단 테스트해본 것일 수도 있다.
- 만약 b가 답이라면, '무기고 습격 및 무기 탈취'에 대한 거부감을 모를 리 없는 고정간첩단이 이 거부감을 무릅쓸 정도로 군중이 공포, 흥분, 분노에 빠져 있고 자신들의 선동과 몰이에 순순히 따를지 테스트해본 거라 볼 수 있다. 만약 군중이 쉽게 무기고 습격 및 무기 탈취 선동 및 몰이에 당하지 않고 오히려 평소처럼 반감을 보인다면 '저들이 우리를 죽이려 드는데 가만히 앉아서 죽냐? 우리도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냐?'라고 격앙된 모습을 연기하다 사람들의 자제 요청에 단념하는 척하며 무마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중요한 것은 고정간첩단이 준비했던 무장투쟁 봉기 선동 및 개시를 최종적으로 결정하게 만든 사건이라는 점이다.

8. 5월 20일에서 상황이 충분하다고 판단한 고정간첩단은 5월 21일에 선동꾼, 몰이꾼 역할을 하며 계획을 실행한다.
- 이때 조직화된 세력 없이는 불가능한 일들이 발생한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까지 논란이 되는 점이다.
-  아침 8시 45분 경에는 20사단을 공격해 지휘 차량 14대를 탈취
- 지휘 차량 14대 탈취 후 연쇄적으로 내방동 아시아자동차 공장(현 기아 AutoLand 광주)에 가서 버스, 군용차량, 장갑차 등 260여대에 달하는 군용 차량을 탈취
- 오후에 화순, 나주, 함평, 무안, 목포, 영암, 해남, 진도/완도, 강진으로 퍼져서 무기고 습격 및 무기 탈취 후 광주 집결 (실제 소요 시간은 불과 몇 시간)
- 공포, 분노, 혼란에 빠진 시민들의 자발적 움직임으로 일어날 수 있다고 보기 어려운 조직적 공격 전술이라 할 수 있다.
(참고로 이 정도 빠르고 정확한 타격은 SNS, 스마트폰 보급이 일반화된 현대 한국에서도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윤석렬 계엄사태 당시 반대 세력의 국회 집결에 걸린 시간을 생각해보자)

9. 당시는 단순한 시위나 소요 사태조차 북한의 배후 가능성을 우선적으로 의심하던 극단적 냉전·분단 체제 시기였다. 그런 시대에 신군부 세력이 5월 21일에 벌어진 상황을 보고 북한 소행이라 확신했을 확률은 무조건 100%다. 자발적 봉기로 나타날 수 없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전남 서부 각지에서 무기고 습격 성공 및 시위대에 동조하는 움직임이 확실히 관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시다발적 확산을 통한 전선 확장이 아니라 광주로의 집결이 상당히 찜찜했을 수는 있겠지만, 광주를 점령해 확실한 해방구로 만들고 주변에서 연쇄 반응으로 광주를 다시 포위하는 전술일 거라 넘어갔을 수도 있다. (전쟁사에서 봉기가 일어난 후 상징적인 도시를 점령해 확실한 해방구를 건설하려는 패턴은 상당히 흔한 패턴이며, 게릴라전을 펼치더라도 처음부터 게릴라전을 펼치기 보다는 도시 점령과 해방구 건설에 실패하며 게릴라전으로 밀려난 경우가 훨씬 더 많다) 한편으로는, 광주에서 출발해 전남 각 지역의 무기고를 습격해 무기를 탈취한 후에 현장에서 봉기나 이탈을 일으키지 않고 광주로 잽싸게 복귀하는 모습에서 조직적 개입을 확신했을 수도 있다. 신군부가 어떻게 해석했든 전라남도 각지의 무기고 습격 및 무기 탈취 후 광주로의 총집결은 신군부에게 완벽한 '외부 세력 개입'의 확실한 증거였다.

10. 이는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다. 왜냐하면 신군부에서 이렇게 북한의 조직적 개입에 의한 사실상의 '내전 상황과 해방구 건설'이라는 프레임에 갇혔다면, 그 이후는 무조건 이 프레임에 맞춰서 읽고 분석하게 되기 때문이다. 즉, 시민들의 자발적인 질서 유지는 그들의 선량한 의도로 읽히는 것이 아니라 전문화된 조직의 완벽한 통제로 읽히게 되며, 병역 의무 이행 경험으로 한국 성인 남성에게 기본인 간단한 진지 구축, 경계 근무 같은 것 또한 (여기에는 해외와 다르게 예비군 제도까지 존재하며, 당시에는 교련 교육까지 존재했다) 그 정도는 한국 남자들이라면 개나 새나 할 수 있는 수준으로 읽히는 것이 아니라 전문화된 조직이 짧은 시간에 숙달된 전투 조직을 구축했다고 읽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체적으로 봤을 때 지역 점령 차원에서 시민군의 군사적으로 봤을 때 형편 없는 방어 전략은 철저히 간과되고 당장 눈 앞에 보이는 극히 국지적인 군사 훈련을 받은 사람들의 모습에 극도로 큰 의미를 부여했을 것이다.

11. 고정간첩단은 자신들의 목표가 실패했음을 상당히 빠르게 인지했을 것이다. 자신들의 성향과 정반대인 "친미 반북" 성향의 광주 시민들, 기껏 탈취한 무기를 바로 다음 날부터 다시 자발적으로 회수하는 광주 시민들의 모습에서 자신들의 위치가 상당히 불리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지 못할 거라고 결론지었을 것이다.

12. 그래서 고정간첩단은 5.18 광주 민주화운동 시기 내내 주도 세력 및 핵심 세력 지위에 단 한 차례도 들어가지 못 했을 것이다. 그리고 고정간첩단은 빠르면 22일, 늦어도 23일부터 서열 순서대로 점진적으로 시민군에서 빠져나가기 시작했을 것이다. 단, 광주 자체를 탈출했다기 보다는 시민군에서 빠져나가며 일말의 상황이 일어날 가능성 때문에 시위대 내부에 '일반 참여자'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13. 신군부는 당연히 고정간첩단이 북한의 지령을 받았으며, 최후의 항전까지 남아 있을 거라 판단했다. 이는 신군부 및 5.18 진압군 측 인사들의 진술 및 회고에서 항상 일관되게 나타난다. 그들의 진술 및 회고를 보면 분명히 특정 조직의 조직적 개입인데 27일 전남도청 장악 후 증거를 발견하지 못해 증명할 수 없어서 답답해하는 태도를 일관되게 유지하고 있다.

14. 광주 시민들의 진술을 보면 극도의 분노, 공포, 혼란이 혼재되어 냉정한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이 힘든 상황이었음이 관찰된다. 강경 무장 투쟁 선동조차 신군부의 프락치들 소행 아닌가 의심하는 진술까지도 발견된다. (즉, 자신들을 무장 폭도화시켜서 희생양으로 삼으려 했다는 피해의식도 드러난다) 그러나 오직 빠른 시위대 와해와 진압이 목표라서 무리한 진압까지 진행해 사태를 오히려 악화시키던 신군부가 프락치들을 동원해 강경 투쟁을 부추겼다고 상상하는 것은 상식과 완전히 배치된다.

15. 고정간첩단은 북한의 지령을 받고 수행한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그들끼리 자체적으로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나선 것이었기 때문에 상황이 불리함을 인지하자 혼란 상태만 만들고 빠르게 퇴각하기로 결정할 수 있었다. 또한 이들이 5.18 민주화운동 지도부에 들어가지 못하고 일반 참여자 무리에 머물렀기 때문에 이들의 퇴각은 상당히 순조롭게 이뤄졌다.

16. 고정간첩단은 자신들이 준비했던 '한반도 유사시 후방 교란 및 봉기 작전 계획'을 21일에 시위대의 선동 및 몰이를 통해 실행한 순간 신군부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간첩단의 조직적 개입이 있음을 즉각 알아차릴 것이라 충분히 알았을 것이다. 그 상황에서 시민들의 성향이 자신들의 성향이자 목표와 정반대인 친미 반북이며, 무기가 쥐어졌음에도 급진 강경 무장투쟁으로 급격히 일방적으로 쏠리지 않는 것을 목격하며 빠르게 '남한 내 무력투쟁'이라는 원대한 목표에 대해서 사실상의 실패를 인정했을 것이다. 즉, 시위대 장악을 완전 포기하지는 않으나 사상적 동조자 포섭 및 빨치산 투쟁 및 아지트 건설 등 후속 작전 개시가 상당히 어려울 것으로 판단해 "대규모 유혈 학살 사태 발발"에 만족하기로 방향을 잡았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들이 27일 마지막까지 전남도청에 남아 있어야 할 이유도 없어진다. 또한, 적당한 때에 대규모 유혈 사태만 일으키고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목표가 된다. 강경 투쟁파조차 친미 반북인데, 자신들과 완전히 반대 성향인 사람들과 함께 싸워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17. 고정간첩단은 북한의 개입 및 지령이 없었기 때문에 전략적 유연성을 확보했다. 만약 북한의 개입 및 지령이 있었다면 상당히 경직되고 기존 패턴과 상당 부분 일치하는 모습이 나타났을 것이다. 즉, 북한이 개입했다면 이들은 마지막 항전에는 참여하지 않았더라도 후속 작전 (무기 일부 은닉, 포섭 및 빨치산 투쟁, 아지트 건설 등)을 무리하게 추진하다 신군부에게 체포되었을 것이다. 신군부도 바보가 아닌 이상 다시 회수한 무기와 당시 탈취된 무기의 종류와 수를 비교하는 간단한 방식으로 낌새를 확실히 알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18. 고정간첩단은 늦어도 23일부터 순차적으로 퇴각했으며, 26일 저녁 무렵에는 전원이 모두 퇴각했을 것이다.

19. 신군부는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당연히 이들이 5.18 민주화운동 지도부 내부 및 근처에 존재할 것이며, 최후까지 전남도청에서 항거할 것이라 판단했다.

20. 그러나 고정간첩단은 5.18 민주화운동 지도부 내부에 들어가지 못 했고 일반 참여자 수준에 머물렀으며, 이미 26일 저녁 무렵에는 전원 퇴각 완료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신군부가 27일 전남도청을 장악했을 때 전남도청 점거자들 사이에 당연히 있을 리 없었고, 증거조차 남아 있을 리 없었다.

21. 한편 시민들은 이들의 존재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과격, 강경 투쟁을 선동하는 열혈 참가자' 정도로 인식했을 것이다. 또한 이들이 누구인지 정확히 파악할 상황이 아니었다.

22. 아마 이들은 광주 봉쇄가 풀린 28~29일에 광주를 완전히 탈출했을 것이다. 이 기간 신군부는 27일 체포된 전남도청 점거자들 사이에서 간첩 색출을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기존 사례들과 달리 고정간첩단이 지도부 및 최후 항쟁자들 사이에 존재하지 않고 '선동해서 사태를 극단적으로 악화시키기만 하고 탈출해버리는 가능성'을 아예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23. 이렇게 보면 당시 광주 시민들의 진술이 모두 참이고, 진압군 핵심 지도부 인물들의 진술 또한 모두 참이라는 가정이 성립하며 단일변수로 오늘날 현재까지 이어지고 제기되고 있는 5.18의 미스테리가 완벽히 풀리게 된다.


단, 이 추측 및 시나리오는 어디까지나 5.18 민주화 운동 당시 광주 시민들이 순수한 자유, 평화, 민주주의의 열망과 친미 반공 성향을 갖고 그에 따라 운동을 벌였다는 가정과 북한이 개입하지 않았다는 가정 하에서만 성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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