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트르 실존주의 철학과 카뮈 부조리 철학의 근본적 핵심 차이 및 혼동 발생 원인

사르트르 실존주의 철학과 카뮈 부조리 철학의 근본적 핵심 차이 및 혼동 발생 원인



프랑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와 알베르 카뮈는 일반적으로 둘 다 실존주의 철학자로 구분해요. 둘의 철학 모두 실존주의 철학이라고 하구요. 그렇지만 사르트르 실존주의 철학과 카뮈 부조리 철학은 상당히 큰 차이가 있어요. 헷갈릴 수가 없는데 헷갈려 하는 사람이 상당히 많아요.

철학은 그 특유의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가 난무하고 말을 일부러 어렵게 쓰는 경우가 많아서 더욱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도 있어요. 특히 같은 단어이지만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된다면 둘은 더욱 헷갈리고 극심한 혼동에 빠지게 되요. 이게 매우 크게 발생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글에서 다루는 사르트르 실존주의 철학과 카뮈 부조리 철학의 근본적 핵심 차이에요.

사르트르 실존주의 철학과 카뮈 부조리 철학 모두 깊게 들어가면 어렵지만, 한편으로는 매우 간단하고 강력한 방법으로 설명할 수 있어요. 그리고 이렇게 하면 둘의 차이는 절대 헷갈릴 수가 없어요.

1. 사르트르 실존주의 철학


사르트르 실존주의 철학을 간단히 정의하면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에요. 실존은 무엇이고, 본질은 무엇이며, 이게 무슨 말이며, 여기에서 어떤 식으로 전개되는지 감을 잡기 어려워요. 사르트르 실존주의 철학에서 매우 유명하고 이 철학이 뭔지 보여주는 간단한 멘트이지만, 정작 이걸 쉽게 알아듣도록 설명하라고 하면 어려워하고 헤메는 사람이 많아요. 여기에 카뮈 부조리 철학과 뭐가 다르냐고 하면 거의 대부분은 진짜로 답을 못 해요. 이게 웃어넘길 일이 아니라 진짜 현실인 이유가 출시된 지 80년이 넘은 소설인 이방인에 대해 아직도 해석이 난무하고 뜨거운 논쟁이 벌어지는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거든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 원래부터 어떤 것이라고 정해진 것은 없다. 내가 어떤 것인지를 정한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말은 난해하지만, '원래부터 어떤 것이라고 정해진 것은 없다. 내가 어떤 것인지를 정한다'라고 말을 바꾸면 매우 쉬워져요. 이걸 예시로 보면 더 쉬워요.

치약이 있어요. 치약 회사는 양치하라고 치약을 만들었어요. 그러나 이 치약을 어떻게 쓸 지는 소비자 마음이에요. 정확히는 치약의 본질이 바뀌는 게 아니라 '치약을 어떻게 사용하는 인간'인지는 자기 자신이 결정한다는 거에요.

A. 양치를 한다 : 치약=양치용 물질->치약을 양치용 물질로 사용하는 인간
B. 청소하는 데에 쓴다 : 치약=청소용 세척제->치약을 청소용 세척제로 사용하는 인간

치약을 '이를 닦는 용도의 물질'로 의미를 부여하고 그렇게 사용할지, '청소용 세척제'로 의미를 부여하고 그렇게 사용할지는 전적으로 소비자 자신의 판단에 달려 있어요. 아무리 치약 회사가 이건 양치용으로 쓰라고 해도 상관없어요. 자신이 어떻게 의미를 부여하고 그에 따라 사용하는지가 중요해요. 이를 닦는 목적으로 치약을 사용한다면 그 순간 자신은 자기 자신을 '치약을 양치용 물질로 사용하는 인간'으로 결정한 거고, 청소용 세척제로 치약을 사용한다면 그 순간 자신은 '치약을 청소용 세척제로 사용하는 인간'로 결정한 거에요.

의미를 부여한다=나의 존재 의미=사르트르 실존주의


위에서 봤듯이 치약의 용도를 결정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판단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이 의미를 부여하는 것 자체가 상당히 중요해요. 자신이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지에 따라 작게는 하나의 물건에서부터 크게는 이 세상까지 완전히 달라지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사르트르 실존주의에서는 의미 부여 그 자체가 실존적 승리라고 해석해요.

간단히 말해서 '나는 의미를 부여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할 수 있어요.

무의미, 무의미함=정해진 의미가 없다


치약의 예시부터 다시 볼께요. 치약회사가 치약을 어떤 목적으로 만들었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아요. 그 치약에 어떻게 의미를 부여하고 어떻게 사용할지는 전적으로 치약을 구매한 소비자 자기 자신이 결정하는 거에요. 아무리 치약회사가 이 닦는 용도로 사용하라고 해도 내가 그렇게 싫고 청소용 세척제로 쓰겠다고 한다면 그만이에요.

즉, 처음부터 내가 치약을 어떻게 사용할지 - 치약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지 정해진 게 없어요. 이게 바로 사르트르 철학에서 말하는 무의미, 무의미함이에요. '정해진 의미가 없다'라는 거에요. 자신이 어떻게 의미를 부여하는지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고, 그 의미로 존재하게 된다는 거에요.

우연=세상의 근본이자 인과관계 붕괴의 순간


원래부터 정해진 의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 인과관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에요. 인과관계라는 게 원래부터 의미가 존재할 때 성립하는 거니까요. 하지만 사르트르 철학에서는 원래부터 정해진 의미가 없다고 봐요. 그러면 필연적으로 모든 것은 우연으로 인해 의미가 결정된다고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사르트르 철학에서는 우연을 상당히 중요시 봐요.

더 나아가 한 번 자기가 부여한 의미가 전혀 다른 의미로 바뀌는 일에는 자신이 원래 부여한 의미와 새롭게 부여하는 의미 간에 인과관계가 전혀 없을 수 있어요. 다시 치약의 예시로 돌아가자면, 원래는 양치하는 목적으로 치약을 사용하고 있었어요. 이는 자기 자신을 '치약을 양치용 물질로 사용하는 인간'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는 거에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너무 화가 나서 치약을 있는 힘껏 집어던졌어요. 이때 자기 자신은 '치약을 화풀이 대상 물체로 사용하는 인간'으로 의미가 바뀌었어요. '치약을 양치용 물질로 사용하는 인간'과 '치약을 화풀이 대상 물체로 사용하는 인간' 간에는 그 어떤 '치약'이라는 물질의 기본 특성을 중심으로 봤을 때 인과관계가 전혀 없어요. 청소용 세척제까지야 이를 닦든 바닥을 닦든 '닦는 것에 쓰는 물질'이라는 의미를 공유하기 때문에 의미의 확장 또는 전이라 볼 수 있지만, '닦는 것에 쓰는 물질'과 '집어던져서 화풀이하는 물질' 사이에는 그 어떤 공유되는 의미가 존재하지 않아요. 이건 완전히 의미가 달라진 건데 인과성이라고는 전혀 존재하지 않아요.

그래서 사르트르 철학에서는 우연이 매우 중요해요. 자신이 부여한 의미가 달라지는 원인이 '우연'인 경우가 많거든요. 또한 더 나아가 부조리를 '인과성 없는 우연'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상당히 강해요. 부조리를 '어이없는 일', '인과관계로 설명 안 되는 일'이라 해석해요. 그저 인과성이 붕괴되는 순간이며, 의미가 인과관계를 깨뜨리고 전혀 다른 의미로 변하는 상황이에요.

사르트르 실존주의 철학에서 우연, 부조리는 인과관계 및 연속성의 붕괴이며, 이게 인간에게 주어진 절대적 자유이지만 동시에 심리적으로 힘들게 하는 불안이자 공포라고 봐요. 그리고 이 공포에서 도망치지 말고 다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자유의 결단을 내리라고 해요.

재미있는 점은 이 우연, 부조리가 긍정적인 쪽으로 터져도 사르트르 실존주의 철학에서는 똑같이 공포를 안기고 다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자유의 결단을 내리라고 해요. 예를 들어서 갑자기 일획천금해서 떼부자가 되었다고 가정해요. 뭐 극단적으로 아무 기대 안 했던 로또가 1등 당첨되었다든가, 완전히 망했다고 포기한 코인이 자고 일어났더니 1000% 상승해서 떼돈을 벌었다든가 이런 거요. 이때 분명히 갑자기 떼돈을 벌고 인생역전했으니 본인은 무지 기분 좋을 거에요. 그러나 사르트르는 이에 대해서도 우연, 부조리로 인한 공포가 발생한다고 봐요. 왜냐하면 갑자기 자신의 신분과 지위가 바뀌었기 때문에 그에 맞춰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다양한 걱정이 떠오르니까요. 그게 당사자에게 즐거운 걱정이라고 하더라도, 본질은 공포라고 보는 거에요.

사르트르 실존주의 철학에서 보는 부조리=극단적인 우연성, 인과관계의 극단적인 붕괴


사르트르 본인이 그렇게 본 것은 절대 아니에요. 사르트르 원전에서 부조리를 극단적 우연으로 정의하지 않았어요. 사르트르가 부조리를 극단적 우연이라고 정의했다고 이해하면 완전히 이 글을 엉터리로 읽은 거에요.

하지만 이후 사르트르 실존주의 철학을 계승한 많은 실존주의 해석자들이 보는 부조리는 주로 '우연성'에 집중해서 보는 편이에요. 그래서 부조리라는 말을 쓸 때 '우연'을 상당히 많이 강조해요.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사르트르가 그랬다는 게 절대 아니에요. 사르트르가 그랬다는 것이 아니라, 사르트르 실존주의 철학 관점으로 부조리라는 말을 사용하는 많은 사람들이 '조리 없음', '조리가 있지 않음' - 즉 '인과관계가 무너짐'으로 해석하고 사용한다는 점이에요. '부조리'라는 용어는 카뮈가 들고 나온 개념이지만, 사르트르 실존주의 철학에서도 이 용어를 사용하며, 이때는 우연성에 집중해서 본다는 점이에요. 이쪽에서는 우연 중에서도 극단적인 우연을 부조리라고 표현하는 편이에요.

사실 카뮈 철학에서 나오는 부조리라는 상황을 상상해보면 많은 경우에 극단적 상황에서 일어나는 일이니 이런 식으로 의미를 살짝 바꿔서 사용하는 것도 이해할 만한 일이에요. 문제는 카뮈 철학 부조리조차 이렇게 단순히 '극단적 우연'이라고 여겨버리는 일이 많아서 문제이지만요.

사르트르 실존주의 철학의 약점


여기까지 봤다면 사르트르 실존주의 철학을 쉽게 이해했을 거에요. 물질에는 변화가 없으나, 그 물질에 의미를 부여하는 인간은 자기 스스로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에 따라 달라지며, 이 의미 부여를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어요. 극단적으로 자신 앞에 있는 금괴에 대해서 '내 앞에 있는 것을 황금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다루는 인간'과 '내 앞에 있는 것을 쓸모 없는 금속 조각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다루는 인간'이란 물질에 대한 인간의 판단과 태도는 달라지고, 이걸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결정하라는 거에요. 자신이 금괴를 어떻게 보든 금괴는 안 변하지만, 자기 자신은 분명히 달라지니까요.

이렇게 보면 상당히 매력적으로 보이고 호소력도 상당히 강해 보이지만, 무시하지 못 할 약점도 있어요.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의미 부여의 결과가 허무라면?

사르트르 실존주의 철학에서 제일 어려운 문제가 바로 이거에요.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의미 부여의 결과가 허무라면 이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냐는 거에요.

보다 더 와닿게 당장 모두가 겪는 현실의 문제로 예를 들께요.

내가 매일 일하는 행위의 의미가 없다. 허무하다.

분명히 자신이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의미를 부여했는데 결과가 '의미 없음', '허무'로 나왔어요. 타인의 강요 같은 게 아니라 자기가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자신의 '일하는 행위'라는 것에 의미를 부여했는데 그게 의미없음, 허무로 나와버리면 어떻게 해야 하냐는 거에요. 실제 이거 겪는 직장인들 무지 많죠. 솔직히 일하러 가고 싶어서 가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요? 매일 의욕에 차서 일하는 사람이 많겠어요, 그냥 한숨 푹 쉬며 일하는 사람이 많겠어요? 권태, 매너리즘에 빠진 사람이 뭐 한둘이냐구요.

문제는 자기 자신에 부여한 의미라는 게 쉽게 바뀌는 성질의 것이 아니에요. 더 나아가 이렇게 자신이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내린 판단이 의미 없음, 허무로 나왔을 때에는 의미 없음, 허무의 특징상 아무리 의미 부여를 하려 해도 계속 의미 없음, 허무로 의미 부여 결과가 나와버려요. 이때부터는 무의미한 동그라미를 그리며 뱅뱅 돌아요.

내가 의미를 '허무'로 부여했다
- 결과 허무
- 내가 허무에 의미를 부여했다
- 결과 허무
- 내가 허무에 의미를 부여했다
- 결과 허무
- 이후 무한 반복

이 따위 결과물이 나온다는 거에요. 이게 비약이나 웃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무수히 많은 직장인들에게 발생하는 현상이에요.

더 나아가 허무주의라고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허무하다는 의미를 부여한 건 자기 자신이잖아요. 세상이 허무하다고, 무가치하다고 의미를 부여하는 게 꼭 항상 반드시 수동적이고 피동적이라는 게 아니에요. 즉, 사르트르 실존주의와 허무주의는 '이 세상 모든 것에 정해진 의미란 없다. 내가 그 의미를 부여한다'라는 점에서 같고, 그 결과값이 '허무'로 나오면 허무주의와 구분이 안 되요. 괜히 실존주의와 허무주의가 절대 공존할 수 없어 보이는데 한 몸에 붙어 있는 왼손과 오른손처럼 같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게 아니에요. 사르트르 실존주의 철학에서 결과값만 허무, 의미없음으로 결정되면 그때부터는 허무주의와 다를 바 없어요.

사르트르가 이 문제에 대해 방어를 안 한 건 아니에요. 사르트르가 이 문제에 대해 선택이 허무로 끝나는 경우를 나쁜 신앙 - 자기기만으로 자유를 피하는 태도라고 반박하기는 했어요. 허무를 능동적으로 선택하는 건 자유를 포기하는 거라고 설명했어요. 그러나 이것은 자신의 철학 논리로 방어했다기 보다는 사실상 '이러면 오류난다. 하지 마라'에 가까워요. 결정적으로 결과값이 '허무'에 빠졌을 때 어떻게 빠져나와야 하는지 뾰족한 답이 안 나와요. 허무, 의미없음이라는 결과값이 피하고 싶다고 항상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 값에 빠지면 아무리 의미를 부여해도 허무, 의미없음이라는 값이 도출되어 버리는 성질이 있는데 이에 대해 명쾌한 답을 제대로 내놓지 못 했어요.

더 나아가 이렇게 허무의 무한 루프에 갇혀 버릴 때, 진짜 '우연히' 빠져나오지 못한다면 허무의 무한 루프 속에서 상황이 끝없이 더 허무의 늪으로 빠져가며 극단으로 치달아갈 수 있다는 문제가 있어요. 이게 사르트르 실존주의 철학에서 진짜 어려운 문제이고 약점이에요.

2. 카뮈 부조리 철학


카뮈 부조리 철학은 사르트르 실존주의 철학보다 훨씬 직관적이고 단순해요. 사르트르 실존주의 철학을 계승한 많은 실존주의 해석자들이 카뮈 부조리 철학에서 사용하는 용어들을 사르트르 실존주의 철학에 맞춰서 오용하고 왜곡하고 그런 게 범람하며 상당히 난해하고 사르트르 실존주의 철학과 헷갈리게 만드는 게 심할 뿐이에요. 또한 어렵지 않은 걸 기괴할 정도로 심각하게 어려운 말을 사용하고 이상하게 돌려서 설명하려고 해요.

카뮈 부조리 철학은 아래의 단 한 문장으로 모든 걸 다 말할 수 있어요.

La lutte elle-même vers les sommets suffit à remplir un cœur d'homme; il faut imaginer Sisyphe heureux.
산꼭대기를 향한 투쟁만으로도 인간의 마음을 채우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시지프가 행복하다고 상상하여야 한다.

카뮈 부조리 철학을 간단히 정의하면 '아무리 세상이 무가치해도 지금 자신의 감각으로 느끼는 나 자신의 행복에 집중해 허무함에 맞서 싸우고 생존하자'라고 정의할 수 있어요. 아, 진짜 쉬워요. 카뮈 부조리 철학도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어렵지만, 의외로 핵심은 상당히 단순해요. 세상이 무가치하든 뭐하든 자신의 감각으로 당장의 행복에 집중하자는 거에요.

무의미


카뮈 부조리 철학에서 말하는 무의미는 사르트르 실존주의 철학에서 말하는 무의미와 전혀 의미가 달라요. 사르트르 실존주의 철학에서 '무의미'란 '정해진 의미가 없음'이라는 의미라고 했어요. 그러나 카뮈 부조리 철학에서 말하는 무의미는 '무가치함', '가치 없음'의 의미에요. '정해진 의미가 없음'과 '가치 없음'은 완전히 다른 말이에요.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말 그대로 '정해진 의미가 없음'과 '가치 없음'의 차이라고 받아들이면 되요.

카뮈의 무의미를 '의미를 찾지만 세계가 응답 안 하는 상태'라고 표현하기는 하는데, 이로 인해 느끼는 감정이 바로 '무가치함, 가치없음'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무의미는 '무가치함', '가치 없음'으로 이해해도 되요. 더 나아가 이렇게 이해하는 게 오히려 정확하고, 이어지는 철학적 정의와 표현들을 이해할 때 쉬우면서 제대로 이해할 수 있어요.

정해진 의미가 없다는 건 자기가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면 되요. 그러니 '아직 정해지지 않은 상태'라 할 수 있어요. 그러나 '가치 없음'은 이미 의미를 부여했다는 거에요. 그 부여한 의미가 가치 없다는 거니까 '정해진 상태'에요. 그렇게 의미를 정한 것이 '가치 없음'이라는 거에요. 완전히 하늘과 땅 차이에요. 사르트르의 무의미는 '아직 정해지지 않은 상태', 카뮈의 무의미는 '가치 없다고 정의 내린 상태'라는 거에요.

무의미에 대해 먼저 이야기한 이유는 카뮈 철학의 핵심인 부조리를 정확히 이해할 때 '무의미'라는 말을 사용하곤 하는데, 이게 어떤 의미인지 정확히 알아야 하기 때문이에요. 만약 이 무의미를 잘못 해석하는 순간 카뮈 부조리 철학과 사르트르 실존주의 철학의 차이를 영원히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고 혼동의 늪에 빠지게 되요.

부조리


'부조리'라는 용어는 카뮈가 들고 나온 용어에요. 그런데 이 카뮈 철학에서 '부조리'라는 용어는 사르트르 실존주의 철학을 계승한 많은 실존주의 해석자들이 사용하는 극단적인 우연, 인과관계의 붕괴라는 의미와는 완전히 달라요. 같은 점이 전혀 없다고 해도 될 정도로 달라요.

카뮈 부조리 철학에서 부조리란 '응답 없는 세계와 대답을 원하는 자신 사이의 긴장'을 이야기해요. 보통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이것도 쓸 데 없이 어렵게 설명한 거에요. 아주 쉽고 직관적으로 부조리를 설명하자면, '스스로 무가치하다고 느낀 세상에 느끼는 허무함'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응답 없는 세계와 대답을 원하는 자신 사이의 긴장'과 '스스로 무가치하다고 느낀 세상에 느끼는 허무함'이라는 표현 사이에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해요. 그러나 이렇게 이해해도 되요. 왜냐하면 응답 없는 세계와 대답을 원하는 자신 사이의 긴장에서 느껴지는 감각 중 제일 중요하고 대표적인 감각이 바로 허무함이거든요. 응답 없는 세계와 대답을 원하는 자신 사이의 긴장에서 여러 감정이 느껴질 수 있어요. 분노를 느낄 수도 있고, 슬픔을 느낄 수도 있고, 허탈함, 절망을 느낄 수도 있어요. 하지만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일관되게 아주 강력히 유지되며 결국 극단적 선택으로 몰고가는 감정이 바로 허무함이에요.

쉽게 말해서 부조리란 '무의미한 세상에 대한 극단적 허무함'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어요. 위에서 카뮈 부조리 철학에서 무의미는 '무가치하다'는 의미라고 이야기했어요. 그러므로 '무의미한 세상에 대한 극단적 허무함'은 '가치 없어진 세상에 대한 극단적 허무함'이라고 말을 조금 바꿔서 이해해도 되요. 이러면 사르트르 실존주의와 완벽히 구분되요. 그리고 카뮈가 말하는 부조리의 성질이 뭔지, 더 나아가 극복이 뭔지도 확실히 이해할 수 있어요.

부조리에 빠지는 순간


위에서 부조리란 '가치 없어진 세상에 대한 극단적 허무함'이라고 봐도 된다고 했어요. 그러면 언제 무의미한 세상에 대해 극단적 허무함을 느낄까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세상이 그렇게 되기를 원했지만, 세상이 그렇게 되지 않았을 때 세상이 무의미하고 무가치하게 느껴져요.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렇게 극단적으로 세상에 무의미하고 무가치하고 덧없다고 극도의 허무에 빠지는 일은 우연히 갑자기 일어나는 일도 많지만, 점진적으로 진행되어서 발생하는 일도 만만찮게 많다는 거에요. 단지 한 가지 사건만으로 발생하는 게 아니라 여러 일이 겹치거나 순차적으로 일어나서 빠질 수도 있어요. 카뮈 부조리 철학에서 부조리를 이야기할 때 '우연'을 언급한다면 거의 100% 확률로 사르트르 실존주의 철학과 헷갈려 하는 사람이에요.

왜냐하면 부조리에 빠지게 된 원인은 우연히 발생한 순간적인 충격일 수도 있지만, 그게 아니어도 되거든요. 예를 들어서 뭘 하든 족족 다 망해서 더 이상 뭘 해도 답이 없다고 완전히 정신줄 놔버리고 끝없는 절망과 허무함에 빠진 사람은 일시적 우연과 아무 상관없어요. 아무리 치료를 해도 상태가 악화되기만 하는 환자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것 역시 당장 순간의 우연으로 인해 부조리에 빠지는 게 아니에요. 카뮈 부조리 철학에서 우연은 아예 언급할 가치도 없어요. 무슨 급성 부조리, 만성 부조리 이런 거 가를 거나 아니라면요.

카뮈는 부조리를 단순한 허탈감 같은 거로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정말 극단적 선택지만 남는 심각한 상황이라 이야기했어요. 부조리에 대해 우연성 같은 건 따지지도 않았구요.

부조리가 위험한 이유


부조리라는 건 가치 없다고 느낀 세상에 대한 극단적 허무함이라고 했어요. 이걸 쉽게 표현하면 '아무 것도 의미 없는데 왜 살지? 죽자' 이런 거에요. 이 상태에 빠졌기 때문에 카뮈는 부조리에 빠지는 순간 극단적인 선택으로 가는 선택지만 남는다고 했어요. 우연 때문에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게 아니에요. 부조리를 사르트르 철학의 영향을 받은 학자들이 극단적 우연이라는 의미로 오용하니까 졸지에 카뮈 철학도 해석이 매우 어려워지고 매우 복잡해졌어요. 게다가 설명해놓은 거 보면 뭔 말인지 이해도 제대로 안 되구요.

부조리에 빠졌다는 것은 이 세상 모든 게 더 이상 의미가 없고 자신이 모든 걸 다 놔버린 상태라는 거에요. 이러면 뭐가 남겠어요. 인생에 어떤 선택지가 남겠어요. 세상도 의미없고 나의 삶도 의미없고 모든 게 다 덧없고 부질없어요. 왜 사는지 모르는 수준을 넘어서 나 하나 없어진다고 뭐 세상이 신경 쓰냐는 극단적 절망과 허무함에 빠진 상태에요.

부조리에 대한 극복


카뮈는 부조리를 수용하고 부조리를 직시하며 저항하라고 해요. 이걸 또 엉망진창으로 설명하고 나눠서 표현하는 일이 많아요. 그래서 더 문제가 되요. 사실 이게 따지고 보면 쉽거든요.

원래부터 나를 위한 세상이 아니었음을 인정하자.
이 세상이 영원히 나를 위한 세상이 아니다.
자신의 감각으로 느끼는 나 자신의 행복에 집중하자.
그 행복에서 출발하는 삶의 새로운 의미를 찾자.
단, 그 새로운 삶의 의미는 영원하지 않음을 항상 잊지 말자
그렇게 허무함에 맞서 싸우고 생존하자

이렇게 보면 상당히 쉬워요. 그런데 이걸 이상하게 어렵고 난해하게 만들고 설명해요. 특히 카뮈는 부조리를 수용하고 부조리를 직시하며 저항하라는 말을 이상하게 끊어서 이야기하면 진짜 완전히 헤매게 되요. 부조리가 위험한 이유까지는 쉽게 이해하더라도 여기에서 제멋대로 잘못 끊고 해석하는 순간 무한히 어렵고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게 되요. 그런데 이런 일이 엄청나게 많이 일어나요.

부조리를 수용하자=이 세상은 원래부터 나를 위한 세상이 아니었다


부조리를 철학적 정의가 아니라 감각으로 표현한다면 가치 없어진 세상에 대한 극단적 허무함이라고 볼 수 있다고 했어요. 그런데 정작 카뮈는 부조리에 빠지면 남는 선택지는 극단적 선택 뿐이라고 했어요. 이러면 완전히 말이 모순이에요. 죽지 말라고 하고서는 지금 죽기로 결심한 마음을 그대로 갖고 있으라는 건 말이 안 되는 소리니까요. 지금 스스로 죽기로 결심한 마음에서 탈출해야 하는데 여기에 머무르라고 하면 이게 말이 되는 소리겠어요. 머무르는 순간 인생 끝인데요. 게다가 이건 카뮈가 부조리에 대해 설명할 때 부조리에서 빠지면 선택지가 스스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만 남는다고 자기가 말한 내용이구요.

그래서 이건 다르게 이해해야 해요. 스스로 극단적 선택을 하기로 결심한 그 마음을 그대로 놔두자는 게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이 세상이 원래부터 자신을 위한 세상이 아니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거에요.

부조리를 직시하자=이 세상이 영원히 나를 위한 세상이 아니다


카뮈는 부조리를 직시하라고 해요. 이건 지금까지만 그랬던 게 아니라 영원히 이 세상은 자신을 위한 세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라는 말이에요. 그리고 한 가지 더 중요한 게 있어요.

의미의 영속성을 믿지 말자
너 멋대로 세상이 언젠가 나를 위해줄 거라고 믿지 말자

이것을 잘못 해석하는 사람도 상당히 많아요. 세상에 의미를 두지 말고, 세상은 무의미하며, 의미 자체가 무가치하다는 것을 아예 그 어떤 의미도 두지 말라고 하는 건 완전히 잘못 이해한 거에요. 진짜 의미는 새롭게 의미를 찾아서 극복해야 하는데 그 의미가 영원할 거라고 믿지 말라는 거에요.

카뮈는 희망을 갖는 것에 대해 부조리를 미래로 미뤄버리는 거라며 부정적으로 봤어요. 이 말의 진짜 의미는 희망도 절망도 없이 그냥 당장 현재에만 충실한 짐승으로 살라는 말이 아니에요. 상식적으로 희망도 절망도 없고 오직 현재에만 감각적으로 충실하라고 하면 이건 본능에 충실한 짐승이니까요. 그리고 희망과 기대도 없다면 아무 것도 안 해도 된다는 의미가 되어버리기도 해요.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해석 잘 해야 해요.

카뮈는 왜 희망을 갖는 것을 부정적으로 봤을까요? 부조리의 원인에 대해 생각하면 간단해요. 희망을 갖는다는 것은 언젠가 이 세상이 자기 자신을 위해줄 거라 믿는 거에요. 그런데 세상은 영원히 자기 자신을 위해주지 않아요. 그러면 또 부조리에 빠지고 위험한 상황에 빠지게 되요. 또한, 덧없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 믿고 버티라고 하는 것은 이미 모든 것에 의미가 없다고 판단내리고 스스로 모든 것을 끝내기로 마음먹은 사람에게 아무 도움 안 되요. 애초에 그렇게 무언가에 삶의 의미를 부여해서 빠져나올 사람이라면 부조리에 빠지지도 않았으니까요. 그 어떤 것에도 삶의 의미를 부여해봐야 의미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부조리에 빠진 건데, 거기에 또 다른 삶의 의미를 부여하라고 한들 의미 부여가 되겠냐는 거에요.

부조리에 저항하자=자신의 감각으로 느끼는 나 자신의 행복에 집중하자. 그 행복에서 출발하는 삶의 새로운 의미를 찾자. 단, 그 새로운 삶의 의미는 영원하지 않음을 항상 잊지 말자.


카뮈는 부조리를 극복하는 방법에 대해 자신의 감각으로 느끼는 나 자신의 행복에 집중하라고 했어요. 자기 멋대로 의미를 부여했다가 의미가 사라지고 무가치하다고 느끼는 세상에서 자기 자신이 감각으로 느끼는 행복만큼은 진실이라는 거에요. 그 감각적 행복에서 출발한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해요. 하지만 그 새롭게 찾은 삶의 의미가 영원할 거라 믿지는 말라고 해요.

삶의 의미를 찾지 말고 삶의 의미를 부정하라는 게 아니에요. 자신의 감각으로 느끼는 자기 자신의 행복에서 출발하는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으라는 거에요. 대신에 그 새로운 삶의 의미가 언제든 또 무의미해지고 사라질 수 있음을 반드시 기억하라는 거에요. 이걸 기억해야 다음에 또 삶의 의미가 사라지고 부조리에 빠졌을 때 스스로 극복해낼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허무함에 맞서 싸우고 생존하자

이것이 바로 카뮈가 말하는 저항이에요. 허무함에 빠져서 스스로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 세상을 회피하는 극단적 선택을 하지 말고 그 허무함을 이겨내라는 거에요. 이 허무함을 이겨내는 것이 바로 저항이에요.

La lutte elle-même vers les sommets suffit à remplir un cœur d'homme; il faut imaginer Sisyphe heureux.
산꼭대기를 향한 투쟁만으로도 인간의 마음을 채우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시지프가 행복하다고 상상하여야 한다.

그래서 이 문장 하나에 카뮈 부조리 철학이 다 들어가 있다는 것이 아니에요. 시지프는 매우 뾰족한 정상에 바위를 올리라는 영원한 형벌을 받았어요. 그래서 백날 천날 정상에 올려봐야 이 짓 자체는 무의미하고 바위는 아무리 올려봐야 계속 굴러떨어져요. 여기에서 시지프는 바위를 올릴 때의 고통 그 자체에서 자신이 살아있다고 스스로 삶의 의미를 찾든, 오늘도 한 번 저 꼭대기까지 바위 밀어보자고 그 순간의 목표를 세우든 하며 행복하게 돌을 밀어올려야 한다는 거에요. 하지만 언젠가 영원히 바위가 뾰족한 정상 위에 안정적으로 멈춰서서 자신의 형벌도 끝날 거라고 제멋대로 상상하면 안 된다는 거에요. 왜냐하면 그렇게 영원한 형벌이 끝날 날을 제멋대로 상상하면 결국 올리는 매 순간이 헛된 기대와 함께 더 힘들고 끔찍할 것이며, 제 풀에 자빠지고 끝없는 절망과 허무함에 빠져버리니까요.

철학적 자살


카뮈 부조리 철학에서는 부조리에 대해 회피하지 말라고 해요. 자기 스스로 극복하려 하지 않고 다른 것에 해결을 맡겨버리는 것을 매우 나쁘게 봐요. 대표적으로 종교에 의지하는 것을 상당히 부정적으로 보고 철학적 자살이라고 해요.

왜냐하면 모든 판단을 포기하고 전부 신에게 결정을 미뤄버리는 거니까요. 능동성과 주체성을 죽여버리는 방식으로 해결하는 거니 이건 육체적으로는 살아 있지만 정신적으로 죽어버린 거라고 매우 부정적으로 봐요.

카뮈 부조리 철학의 약점


카뮈 부조리 철학을 보면 꽤 실전적이에요. 직장인으로 예를 들자면 출근하기 너무 싫은데 당장 오늘 하루만 버텨보자며 그 버티는 자신에게 의미를 부여하며 견뎌내며 허무함에 저항하고 허무함을 이겨내는 거에요. 이 의미는 제각기 달라요. 일하는 동안 고통스러운 느낌을 자신이 살아있음으로 느끼며 행복을 찾을 수도 있고, 일 다 견뎌내고 퇴근 후 마시는 시원한 캔맥주가 주는 기분 좋은 순간을 기대하며 견뎌낼 수도 있어요. 가족과 여행을 갔을 때 느낀 사랑과 기쁨의 짜릿함을 다시 느끼기 위해 다음해 가족 여행을 기대하며 버틸 수도 있어요. 2년 뒤에 더 넓은 집으로, 월세에서 전세로 옮기는 것을 목적으로 견뎌내도 되요. 대신 목표 달성 시기가 길어질 수록 그 안에서 다시 새로운 행복과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해요.

카뮈 부조리 철학에서 부분만 보고 무턱대고 '의미 부여하지 말라고 했다', '희망 가지지 말라고 했다' 이런 건 틀렸어요. 카뮈가 경계한 건 새롭게 찾은 삶의 의미가 영원할 거라 믿는 것이고, 무턱대고 세상이 언젠가 나를 위해주는 세상을 변할 거라는 희망을 갖지 말라는 거에요. 무대책으로 순간의 감각에만 집중해서 그 순간만 생각하며 살라는 게 절대 아니에요. 오래 걸리는 목표를 세우지 말라는 게 아니라 오래 걸리는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달성해가는 과정에서 나름의 행복을 찾아도 되요. 하루살이 인생으로 살라는 게 아니에요. 삶의 의미란 자기 자신의 감각적 행복에 기원을 두고 있고 거기에서 출발해야 하며, 그 삶의 의미와 목표가 무너지더라도 당연히 그럴 수 있다고 항상 기억하고 있으라는 거에요. 이거 오독 상당히 많이 일어나는 부분이에요. 매우 잘 알아야 해요. 이거 오독 상당히 많이 일어나는 부분이에요. 매우 잘 알아야 해요.

이래서 카뮈 부조리 철학이 오늘날 인기가 좋기는 하지만, 카뮈 부조리 철학도 약점이 있어요.

극단적 상황에서 종교를 도구로 사용하는 사람은?
진짜 절망 밖에 안 남은 사람들이 살려고 종교 믿는 것은?

철학적 자살 정의가 너무 성급했던 거 아닌가?

이것이 말꼬리 잡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씩 따져볼께요.

먼저 육체적이나 정신적으로 순간적으로 극단적인 위기에 빠져서 힘을 내려고 도구로 종교를 이용하는 사람은 철학적 자살인가요? 위기상황에서 '신이시여, 제게 힘을 주세요!'라고 외치며 힘을 내며 스스로 난관을 돌파하는 것은 분명히 그 상황에서 타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보다 훨씬 능동적이고 주체적이에요. 또한 이때 신이 힘을 주든 안 주든 상관없어요. 그 순간만 이겨내면 되는 거에요. 이렇게 도구로 종교를 사용하면 매우 애매해져요.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상당히 많아요. 모든 걸 신의 뜻에게 맡겨버리겠다는 게 아니라 딱 위급한 찰나의 순간에 정신 차리고 힘내려고 그때만 도구로써 종교를 사용하는 사람들이요. 이 사람들에게 그건 철학적 자살이고 더 위험하고 극단적인 수렁에 빠져서 부조리와 직면하고 이겨내라고 하는 게 맞냐는 거에요.

여기에서 파생한 질문으로, 부조리의 끝에서 극단적 선택을 하려는 순간 '종교에서 스스로 끝내는 것은 죄악이라고 했어'라고 떠올리며 단념하고 스스로 어떻게든 살아보자고 의지를 다진다면 이것도 철학적 자살일까요?

두 번째로 고문을 당하는 중이라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신에게 의지하는 사람은 철학적 자살으로 봐야 할까요? 정말 절망적인 상황인데 신념을 굽히고 철학적 자살을 피하는 게 맞을까요, 신념을 지키기 위해 철학적 자살을 피하는 게 맞을까요?

첫 번째와 두 번째 질문은 카뮈 부조리 철학으로 방어할 수는 있지만, 논쟁거리이기는 해요. 방어할 수는 있는데 매우 불쾌하게 만들고 극심한 논쟁을 유발하는 회색지대라고 할 수 있어요. 카뮈 부조리 철학에서는 일단 꼭 그렇게 종교를 찾아야 했냐고 따지며 가족에 대한 사랑, 자신의 신념에 대한 믿음 등 지상적 가치로 버틸 수 없었냐고 따질 거에요. 그에 대해서 그거까지 다 했는데도 안 되어서 마지막에 하느님, 부처님, 알라, 온갖 잡신까지 다 찾았다고 반박한다면 - 즉 카뮈 철학대로 지상적 가치로 시도했는데 다 실패해버려서 결국 종교까지 간 거라 답하면 답하기 상당히 어려워져요.

다음 세 번째가 바로 진짜 약점이라고 부를 수 있는 문제에요.

세 번째, 진짜 꿈도 희망도 없는 사람들이 있어요. 감각에서 출발하라고 하는데 느껴지는 거라고는 끔찍한 고통 밖에 없어요. 그 상황에서 정신줄 잡기 위해 종교에 모든 것을 맡기고 간신히 버티는 사람들은 죄다 철학적 자살이라고 비난해야 할까요? 이게 우리 주변에 많아요. 바로 항상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는 시한부 환자들이요. 이런 사람들은 느껴지는 거라고는 차라리 죽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극단적 고통이고, 그나마 정신줄 부여잡고 버티기 위해 모든 걸 종교에 맡기고 이것 또한 신의 뜻이라고 버티는 건데 이런 사람들을 철학적 자살이라고 비난해야 하냐는 거에요.

이 의문들이 주는 공통적인 느낌이 있어요. 카뮈의 소설 이방인과 카뮈 부조리 철학에서 느껴지는 공통적인 느낌이에요. 카뮈가 왠지 극단적인 상황들을 외부 관찰자의 시선으로 다룬 것 같다는 느낌을 피할 수 없어요. 물론 카뮈도 결핵을 앓았고, 많은 어려움을 겪기는 했지만, 정말 그 극단적 상황에 진짜 빠졌던 것 같다는 느낌까지는 안 든다는 거에요. 관찰은 분명히 많이 했고, 자신도 절망을 느낀 경험이 있지만, 이런 극단적인 상황에 대해 외부로 드러나는 것에 치우치고 내면에서 일어나는 정신적 파탄에 대해 아주 깊게 다뤘다고 느껴지지는 않아요. 자신도 어떻게 말하기 어렵고 잘 모르는 부분은 의도적으로 배제한 느낌이 없지 않아요.

결론


이를 쉽게 정리하면 이와 같아요. 완벽히 일치하는 표현은 아니지만 이렇게 이해하면 되요.

사르트르 실존주의 철학 : 이 세상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가 바로 나 자신이다
카뮈 부조리 철학 : 감각적 행복을 느끼고 추구하는 행위가 나 자신이다

사르트르 실존주의 철학에서의 무의미 : 정해진 것이 없다 (아직 의미 부여 미정)
카뮈 부조리 철학에서의 무의미 : 가치 없다 (의미 부여 완료)

사르트르 실존주의 철학에서의 공포 대상 : 우연하게 완전히 달라지는 것
카뮈 부조리 철학에서의 공포 대상 : 세상이 전혀 가치없다고 느껴지는 것

사르트르 실존주의 철학에서 강조하는 말 : 우연
카뮈 부조리 철학에서 강조하는 말 : 부조리

사르트르 실존주의 철학 영향 받은 사람들이 쓰는 말 부조리 : 극단적인 우연
카뮈 부조리 철학에서 부조리 : 스스로 무가치하다고 느낀 세상에 느끼는 극단적인 허무함

사르트르 실존주의 철학에서의 철학적 위기 긴급 대처 방법 : 뭐라도 일단 행동하고 그 행동을 실행한 자신에 의미를 부여하자
카뮈 부조리 철학에서의 철학적 위기 긴급 대처 방법 : 세상이 자기 자신을 위한 게 아니란 걸 받아들이고 감각적 행복을 느끼자

이렇게 보면 둘은 헷갈릴 일도 없고 완전히 달라요. 카뮈 부조리 철학의 정의와 표현이 이상하게 어렵게 표현되는 게 있기는 하지만, 위와 같이 이해하면 내용을 제대로 이해한 거에요. 카뮈 철학에서 무의미에 대해 '세상이 스스로 의미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을 자신이 중심이 되어서 감각적으로 표현한다면 간단히 '가치 없다'라고 하면 되거든요. 부조리라는 것도 말을 보면 어렵고 난해한데 실제 내용을 따지면 이런 식이구요.

그리고 가장 마지막으로 카뮈 철학 '부조리를 수용하고 부조리를 직시하며 저항하라'를 제대로 해석한 것과 사르트르식 '우연'으로 오독한 사람들의 해석이 얼마나 달라지는지 보여드릴께요.

부조리를 수용하고 부조리를 직시하며 부조리에 저항하라

카뮈 부조리 철학에서의 원래 해석
원래부터 나를 위한 세상이 아니었음을 인정하자. 이 세상은 영원히 나를 위한 세상이 아니다. 자신의 감각으로 느끼는 나 자신의 행복에 집중하자! 그 행복에서 출발하는 삶의 새로운 의미를 찾자! 단, 그 새로운 삶의 의미는 영원하지 않음을 항상 잊지 말자. 그렇게 허무함에 맞서 싸우고 생존하자!

사르트르식 '우연'으로 오독한 사람들의 해석
이 세상은 아무런 이유 없이 던져진 '극단적인 우연'의 덩어리일 뿐이다! 그러니 이 무의미한 우연의 파도에 휩쓸리지 말고, 네가 주체적으로 그 우연을 네 삶의 필연적인 '의미'로 바꾸어 저항하라! 어떤 황당한 불행(우연)이 닥쳐도, 그것을 네가 선택한 행동의 재료로 삼아 새로운 자아를 창조하는 것이 진정한 실존적 저항이다!

카뮈와 관련된 글을 볼 때 상당히 많이 보이는 유형이죠. 사르트르식 '우연'으로 오독한 사람들의 해석을 보면 우연 강조, 주체적 의미 부여, 영속적 자아 창조가 뒤섞여서 나타나는 경우가 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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