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소설 중 가장 쉬운 현대 소설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여러 각도로 접근할 수 있어요. 일단 원서로 쉽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 무엇인지를 따질 수 있어요. 얼마나 외국어 학습 초급자가 읽을 수 있는
책인지에 따라 쉬운 소설이에요. 초급자가 읽을 수 있다는 건 문장이 쉽고,
간결하며, 기본 문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말이니까요. 즉 현지 모국어
화자들조차 일단은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쉬운 책이에요.
그 다음에는 해석이 얼마나 쉬운지를 따질 수 있어요. 해석이 쉽다는 건
작가가 이렇게 해석하라고 소설에 대놓고 쓸 수록 쉬워요. 작가가 보라는 대로
보면 되니까요. 작가가 보라고 하는 대로 보고 느끼라고 하는 것이 기본적인
정답이므로 소설 내에서 해석의 여지가 적어요. 작가가 보라는 대로 보고 나서
작가의 생각이 얼마나 맞는지는 독자의 판단이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소설 외적
판단이지 내적 판단은 아니에요. 내적 판단의 여지가 적을 수록 쉬운
소설이에요.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알베르 카뮈의 1942년 발표작인 이방인 - L’Étranger 는
얼핏 보면 원서로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에는 완벽히 부합해요. 알베르 카뮈는
이방인 만큼은 매우 간결하고 쉬운 문장으로 썼어요. 한국어 번역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지만, 프랑스 문학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문어체인 단순 과거가
아니라 회화체인 복합 과거를 써요.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원서로 읽기 위한
프랑스어 학습 수준은 반년 정도 잡으면 되요. 물론 어휘는 당연히 반년 만에
해결될 수준이 아니니 사전을 찾아가며 읽어야 겠지만, 문법적으로는 딱히 막힐
부분이 없다는 거에요.
그렇지만 문제는 바로 이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은 상당히 불친절하고 난해한
소설로 악명 높아요. 소설 분량도 짧은 편이고, 원서로 읽는다고 해도 프랑스어
공부 6개월이면 이방인 읽을 문법 지식은 갖춰요. 그러나 정작 내용에서는 당최
이해가 안 된다고 난리에요. 아직까지도 카뮈의 이방인은 해석이 분분하고
제대로 읽고 음미하기에는 상당히 어려운 소설로 분류되곤 해요. 그래서 독서를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제발 이방인만큼은 추천하지 말라는 경고를 쉽고 볼 수
있어요. 얼핏 보면 쉽지만 이해하기란 상당히 어려운 소설이라구요.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많은 철학적 사고 및 카뮈 철학에
대한 학습이 필요하다고 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방인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어떻게 해석하고 분석해야 하는지 논란이 많아요. 단순히 번역을
어떻게 해야 하냐는 문제가 아니에요. 소설 내용 자체가 어떤 내용인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로 여전히 치열하게 논쟁하고 있는 소설이에요.
그렇다면 이방인은 과연 그렇게 진짜 어려운 소설일까요? 그렇게 불친절한
소설일까요?
장담컨데 절대 아니에요.
오히려 엄청나게 내용적으로도 쉬운 소설에 속해요. 왜냐하면 해석이 쉽다는
건 작가가 이렇게 해석하라고 소설에 대놓고 쓸 수록 쉽다고 이야기했는데,
이방인은 카뮈가 어떻게 읽으라고 대놓고 확실히 써놨기 때문에 카뮈가
읽으라고 한 대로만 읽으면 카뮈가 하고 싶어하는 말 - 카뮈 철학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어요. 카뮈 철학이 뭔지 모르더라도 이게 카뮈가 말하고 싶어하던
거라고 줄거리를 보고 감을 잡을 수 있다는 말이에요.
이 말을 듣고 격분하는 사람이 상당히 많을 거에요. 대체 어디에서 카뮈가
대놓고 이렇게 읽으라고 써놨으며, 그대로 보면 난해할 거 하나도 없다는
거냐고 따지고 싶은 사람이 많을 거에요.
먼저 알베르 카뮈 이방인 줄거리.
1. 제1부: 사건의 발생
-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듣고 양로원에서 장례를 치른 뫼르소는 관습적인
애도를 표하지 않음.
- 장례 다음 날 마리와 재회하여 해수욕과 영화 관람을 즐기고, 성관계를
가짐.
- 이웃 레이몽의 부탁으로 그의 정부를 유인하는 편지를 대필하고, 레이몽이
그녀를 폭행하여 경찰 조사를 받을 때 레이몽이 요청한 대로 그에게 유리한
거짓 증언을 해줌.
- 사장이 파리 지사 근무를 제안하며 출세의 기회를 주지만, 뫼르소는 "삶은
결코 변하지 않으며 어떤 삶이든 다 마찬가지"라며 거절함.
- 이후 마리의 청혼에 "원한다면 해도 좋다"며 무심한 태도를 보임.
- 평소 개를 학대하던 이웃 살라마노가 개를 잃어버리자, 뫼르소는 노인이
전하는 과거사와 슬픔을 묵묵히 경청함.
- 레이몽 등과 함께 간 해변에서 레이몽을 공격했던 아랍인들과 대치하던 중,
뫼르소는 강렬한 태양 아래서 아랍인에게 총 한 발 발사 후 또 4발을
발사함.
2. 제2부: 재판과 사형
- 살인 혐의로 기소된 뫼르소는 재판 과정에서 범행 동기보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보인 무관심한 태도로 인해 '도덕적 살인자'로 비난받음.
- 검사는 뫼르소가 영혼이 없는 괴물이라 주장하며 사형을 구형하고, 법정은
뫼르소의 정직한 진술 '태양 때문에'를 이해하지 못함.
- 사형 판결 후 교정 신부가 찾아와 신에게 귀의할 것을 강권하자, 뫼르소는
격분하며 신부의 멱살을 잡고 고함을 침.
- 신부가 떠난 뒤, 뫼르소는 밤의 정적 속에서 평온을 되찾고 세계가 자신과
닮았다는 것을 느끼며 행복해함.
- 죽음을 앞둔 뫼르소는 자신이 행복하다고 느끼며, 처형 날 많은 구경꾼이
몰려와 자신을 증오의 함성으로 맞이해주기를 바람.
괜히 이 책이 쉽다고 하는 게 아니에요. 문체도 쉽고 줄거리도 매우 간단해요.
1분 요약도 아니고 30초 요약 분량이에요.
그러나 이렇게 간단하지만 해석이 매우 많고 매우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소설이에요.
그러면 왜 이 소설은 읽기 쉬운 소설인데 '해석이 매우 많고 매우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소설'이며 극도로 난해한 소설로 취급받을까요?
이유는 바로 이 소설 제일 마지막에 있어요.
알베르 카뮈 이방인 해석이 어렵다는 이유 - 카뮈 철학과의 정면 충돌하는 마지막 장면
먼저 카뮈 철학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어요.
인간은 삶의 의미를 자신만의 신처럼 여기며 따라 살아가며,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상태-즉 부조리(허무, 무의미함)에 빠지면 자살한다. 신처럼 여기며
따라 살아가던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다면 현실에 감각적으로 충실한 자기
자신을 삶의 의미로로 삼아서 살아야 한다. 자기 자신의 실존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알베르 카뮈는 자살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입장이었어요. 카뮈 철학에 대한
각각의 견해와 해석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자살'에 반대한다는 것만큼은
절대적으로 받아들여야 해요.
카뮈는 '삶의 의미를 잃은 상태'를 부조리라고 표현했어요. 부조리의 일반적
의미인 '이치에 맞지 아니하거나 도리에 어긋나는 일'과는 달라요. 카뮈가
주장한 '자살하는 이유'란 '삶의 의미를 잃었기 때문'이에요. 삶의 의미를 잃는
상태에 빠지면 자살하거나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아서 극복해야 하는데, 이때
새로운 삶의 의미란 자기 자신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해요. 무의미함을
정면으로 주시하며,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 주체적이며 능동적인 삶의 의미를
스스로 창조해야 한다는 말이에요.
여기에서 더 나아가서 무의미함 속에서 찾는 진정한 신 - 삶의 진정한 의미란
무의미함(부조리)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자기 자신의 순수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행위 그 자체, 그리고 자기만의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한 반항이라고
해석해요.
1942년에 발표되었지만 오늘날까지도 이 세계적으로 엄청나게 논란인 마지막
문단. 여기에 카뮈가 하고 싶은 말이 직설적으로 다 들어가 있어요. 카뮈가
이렇게 읽으라고 여기에서 아주 친절하게 알려주고 있어요. 이대로만 읽는다면
절대 이 소설에서 헤멜 수 없다고 확신에 차서 외치고 있어요. 은유도 아니고
직설적으로 이렇게 읽으라고 써놨어요. 그것도 책을 대충 보는 사람들은 맨
앞과 맨 뒤만 본다는 점을 고려했는지 제일 마지막 장 제일 마지막을 이렇게
썼어요.
Lui parti, j'ai retrouvé le calme.
그가 떠나고, 나는 평온을 되찾았다.
J'étais épuisé et je me suis jeté sur ma couchette.
나는 기진맥진했고 나의 간이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Je crois que j'ai dormi parce que je me suis réveillé avec des étoiles
sur le visage.
얼굴 위에 별들을 보며 깨어난 것으로 보아 나는 잠을 잤던 것 같다.
Des bruits de campagne montaient jusqu'à moi.
시골의 소리들이 나에게까지 올라오고 있었다.
Des odeurs de nuit, de terre et de sel rafraîchissaient mes tempes.
밤의 냄새들, 흙과 소금의 냄새들이 나의 관자놀이를 식혀주었다.
La merveilleuse paix de cet été endormi entrait en moi comme une
marée.
잠든 이 여름의 경이로운 평화가 밀물처럼 내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À ce moment, et à la limite de la nuit, des sirènes ont hurlé.
그 순간, 그리고 밤의 경계에서, 사이렌들이 울부짖었다.
Elles annonçaient des départs pour un monde qui maintenant m'était à
jamais indifférent.
그것들은 이제 나에게 영원히 무관심한 한 세계를 향한 출발들을 알리고
있었다.
Pour la première fois depuis bien longtemps, j'ai pensé à maman.
오랫동안 중 처음으로,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
Il m'a semblé que je comprenais pourquoi à la fin d'une vie elle avait
pris un « fiancé », pourquoi elle avait joué à recommencer.
한 인생의 끝에서 그녀가 왜 한 명의 '약혼자'를 가졌었는지, 왜 다시
시작하는 놀이를 했는지 내가 이해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Là-bas, là-bas aussi, autour de cet asile où des vies s'éteignaient, le
soir était comme une trêve mélancolique.
저기, 저기 또한, 생명들이 꺼져가던 그 요양원 주변에서, 저녁은 우울한
휴전과도 같았다.
Si près de la mort, maman devait s'y sentir libérée et prête à tout
revivre.
죽음에 그토록 가까이서, 엄마는 거기서 스스로 해방되었음을 그리고 모든
것을 다시 살 준비가 되었음을 느꼈음이 틀림없다.
Personne, personne n'avait le droit de pleurer sur elle.
아무도, 아무도 그녀 위에서 울 권리를 가지지 못했다
Et moi aussi, je me suis senti prêt à tout revivre.
그리고 나 역시, 모든 것을 다시 살 준비가 되었음을 느꼈다.
Comme si cette grande colère m'avait purgé du mal, vidé d'espoir, devant
cette nuit chargée de signes et d'étoiles, je m'ouvrais pour la première
fois à la tendre indifférence du monde.
이 커다란 분노가 나를 악으로부터 정화하고, 희망으로부터 비워내 준 것처럼,
기호들과 별들로 가득 찬 이 밤 앞에서,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다정한 무관심에
나를 열고 있었다.
De l'éprouver si pareil à moi, si fraternel enfin, j'ai senti que j'avais
été heureux, et que je l'étais encore.
세계가 그토록 나와 닮았음을, 마침내 그토록 형제 같음을 느끼며, 나는 내가
행복했었다는 것을,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다.
Pour que tout soit consommé, pour que je me sente moins seul, il me
restait à souhaiter qu'il y ait beaucoup de spectateurs le jour de mon
exécution et qu'ils m'accueillent avec des cris de haine.
모든 것이 완성되기 위해, 내가 덜 혼자라고 느끼기 위해, 나에게 남은 것은
나의 처형 날에 많은 구경꾼이 있기를 그리고 그들이 증오의 외침들로 나를
맞아주기를 바라는 것뿐이었다.
이 마지막 문단이 문제인 이유는 정작 가장 중요한 이유에 대한 설명이 누락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에요. 인과관계가 모순이고 박살났다고 표현해도 될
정도로요.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인과 관계가 모순이고 박살난 것까지 넘어간다고 쳐요. 뭐 해석에 따라
사형수의 불안한 심리, 횡설수설이라 할 수도 있죠. 이것도 해석이라면
해석이니까요. 그런데 더 중요하고 너무나 심각한 문제가 있어요.
카뮈는 자살을 극도로 비난한다
뫼르소는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인다
자살을 비난한 카뮈와 소설에서 죽음을 받아들이는 뫼르소의 모습은 얼핏 보면
완전히 대조되요. 마지막 문장을 보면 뫼르소는 사형을 덤덤히 받아들이는 것
같아요. 체념, 달관 같아 보인다는 거에요. 뫼르소가 '살려는 의지'를 전혀 안
보여줘요. 카뮈 철학의 핵심은 부조리(삶의 의미 상실로 인한 무의미함)에
맞서서 치열하게 삶을 지켜내라고 하는 건데 뫼르소는 법정에서 자기 변호도 적극적으로 안
하고 살려고 발악하는 모습도 없어요. 그러고는 이렇게 죽음을 받아들여버려요.
살기 위해 발버둥쳐야 하는 카뮈 철학적 인물과 뫼르소는 이렇게 보면 극도로
대비되요.
게다가 뫼르소의 평온함이 삶에 대한 애착이 없는 허무주의자의 모습과
똑같아요. 뫼르소는 죽기 직전에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을 느끼며 행복해해요.
죽기 직전에 세상이 자신에게 무관심한 것에서 행복함을 느끼는 뫼르소는 모든
것을 다 내려놓은 모습으로 비쳐져요. 이는 자살하지 말고 열심히 살라는 카뮈
철학과 정면으로 충돌해요. 이는 어떻게 보면 카뮈가 극도로 싫어했던
허무주의, 또 어떻게 보면 카뮈가 마찬가지로 극도로 싫어했던 '철학적 자살'의
변종처럼 보여요.
설상가상으로 오리엔탈리즘적 해석에서는 이 마지막까지 뫼르소가 아랍인에게
미안해하지 않았음을 근거로 이 책이 지극히 인종차별적이라고 비난해요.
더욱 해석하기 곤란하게 만드는 점은 하필 이 소설이 '사실상 뫼르소의
죽음'으로 끝난다는 점이에요. 카뮈 철학 전개대로라면 부조리에 좌절하고
자살의 위기에서 이를 극복하는 모습으로 전개되고 끝나야 하는데 소설은 정작
뫼르소가 처형의 순간을 기다리며 죽음을 받아들이는 걸로 끝나기 때문에 정작
카뮈가 이 소설에서 말해야 하는 '부조리를 극복하는 개인'이 어디 있냐는
문제가 있어요. 그렇다고 이게 시간을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는 구조도 아니고
지극히 단편적인 시간 흐름을 따라 전개되니 앞에서 찾을 수도 없어요.
이러니 이 소설의 마지막이 엄청나게 논란이고 이 소설은 미궁 상태로
끝나버린다고 보는 독자가 무지 많아요.
이 마지막 문단만 잘 해석한다면 이 책은 상당히 쉬워져요. 문제는 이 마지막
문단 해석이 계속 엇갈리고, 책 전체를 일관되게 해석하는 해석이 없다는
점이에요. 어떤 해석이든 반드시 한 부분에서는 해석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요.
오히려 여태까지 아주 난장판이에요.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해석 방법 - 역설계 방식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이 여전히 가장 어렵고 해석이 제각각인 이유는 바로
마지막 문단 때문이에요.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카뮈는 바로 마지막 문단에
독자들에게 아주 친절하게 이 책을 해석하는 방법을 적어놨어요. 그렇기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문장 중 하나인 이방인 시작 - Aujourd'hui, maman est
morte. Ou peut-être hier, je ne sais pas. 부터 따지고 들어가는 것보다 맨
마지막 문단을 해석하고 분석하며 카뮈가 이 책을 보는 방법을 찾아낸 후
처음부터 순차적으로 나아가는 게 좋아요. 안 그러면 Aujourd'hui, maman est
morte. Ou peut-être hier, je ne sais pas. 에서부터 헤메기 시작하고, 이는
전체적인 오독과 미국으로 빠지게 만들어요.
사실 이 글을 보는 사람들이라면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읽은 사람들일
것이며, 아니라 해도 위에 간단하게 줄거리를 써놨어요.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줄거리는 책 안에서 안 벗어나고 요약하면 매우 단순하기 때문에 딱 저거 보면
되요. 분명히 말하지만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은 분량도 짧고 문체도 담백하고
쉬우며 해석이 문제이지 읽는 것 그 자체는 쉽다고 했어요.
역설계 방식으로 접근할 때 핵심은 바로 이 논란의 핵심인 마지막 문단에서
알베르 카뮈가 도대체 이 소설을 어떻게 읽으라고 직접 말하는 것에 가깝게
말했는지 찾아내는 것이 1차 목표에요.
또한 이 목표를 달성했다면 구조적으로 이것이 카뮈 철학 - '인간은 삶의
의미를 자신만의 신처럼 여기며 따라 살아가며,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상태-즉
부조리(허무, 무의미함)에 빠지면 자살한다. 신처럼 여기며 따라 살아가던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다면 현실에 감각적으로 충실한 자기 자신을 삶의 의미로로
삼아서 살아야 한다'는 전개가 완벽히 이 소설에 들어가 있는지, 이 주장이
완벽히 나타나 있는지 맞춰봐야 해요. 즉 해석에 따라 보면서 카뮈 철학에
부합하는 전개로 흘러가는지 역설계해봐야 해요.
이 역설계가 성공한다면 우리는 드디어 시지프스가 행복하다면 단두대 위
뫼르소 또한 반드시 행복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어요. 이는 카뮈가 평생
외쳤던 뫼르소는 허무주의자가 아니라는 주장과 일치함을 의미해요. 단두대 위
뫼르소는 반드시 행복해야 해요. 왜냐하면 그래야 바로 뫼르소가 카뮈 철학에
부합하는 인물이 되기 때문이에요. 체념, 허무, 달관 같은 것으로 끝나면 안
되요. 무조건 뫼르소는 행복해야 해요. 증오의 외침들로 맞이하는 그 순간이
뫼르소에게는 행복하고 황홀한 순간이 나와야만 뫼르소는 자살한 것이 아니며,
카뮈가 원하는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감각적 합리주의자가 되요.
그리고 이 역설계가 성공했다면 만만찮은 맨 처음 문장 - Aujourd'hui, maman
est morte. Ou peut-être hier, je ne sais pas. '오늘 어머니가 죽었다.
어제인가, 모르겠다'를 제대로 해석할 수 있고, 이 문장을 제대로 해석하면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총성 중 하나인 Alors, j'ai tiré encore quatre fois
sur un corps inerte où les balles s'enfonçaient sans qu'il y parût.
'그래서, 나는 탄환들이 박혀도 표시가 나지 않는 움직이지 않는 시체 위에
다시 네 번을 쐈다.'도 해석할 수 있게 되요.
참고로 이방인은 크게 제가 말한 이 세 부분에서 해석이 엇갈리고, 세 부분
해석을 일관된 논리로 전부 설명한 해석이 매우 드물어요. 첫 문장에서
뫼르소는 왜 그렇게 무덤덤했는지, 그리고 1장 마지막에서 왜 추가로 네 발을
더 쐈는지, 마지막으로 왜 뫼르소는 죽음을 그렇게 받아들이는지가 핵심
논란거리에요. 이 세 부분만 일관된 논리로 해석하면 사실상 다 끝나는데
문제는 이게 안 되고, 그 결과 오늘날까지도 이 세 부분 가지고 싸우고
있어요.
알베르 카뮈 이방인 마지막 문단 분석
이제 마지막 문단으로 다시 돌아갈께요. 이것만 풀면 자연스럽게 다른 큰
문제가 되는 두 문장도 풀 수 있고, 이러면 알베르 카뮈 이방인 전체를 다 쉽게
분석할 수 있어요.
Lui parti, j'ai retrouvé le calme.
그가 떠나고, 나는 평온을 되찾았다.
J'étais épuisé et je me suis jeté sur ma couchette.
나는 기진맥진했고 나의 간이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Je crois que j'ai dormi parce que je me suis réveillé avec des étoiles
sur le visage.
얼굴 위에 별들을 보며 깨어난 것으로 보아 나는 잠을 잤던 것 같다.
Des bruits de campagne montaient jusqu'à moi.
시골의 소리들이 나에게까지 올라오고 있었다.
Des odeurs de nuit, de terre et de sel rafraîchissaient mes tempes.
밤의 냄새들, 흙과 소금의 냄새들이 나의 관자놀이를 식혀주었다.
La merveilleuse paix de cet été endormi entrait en moi comme une
marée.
잠든 이 여름의 경이로운 평화가 밀물처럼 내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À ce moment, et à la limite de la nuit, des sirènes ont hurlé.
그 순간, 그리고 밤의 경계에서, 사이렌들이 울부짖었다.
Elles annonçaient des départs pour un monde qui maintenant m'était à
jamais indifférent.
그것들은 이제 나에게 영원히 무관심한 한 세계를 향한 출발들을 알리고
있었다.
Pour la première fois depuis bien longtemps, j'ai pensé à maman.
오랫동안 중 처음으로,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
Il m'a semblé que je comprenais pourquoi à la fin d'une vie elle avait
pris un « fiancé », pourquoi elle avait joué à recommencer.
한 인생의 끝에서 그녀가 왜 한 명의 '약혼자'를 가졌었는지, 왜 다시
시작하는 놀이를 했는지 내가 이해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Là-bas, là-bas aussi, autour de cet asile où des vies s'éteignaient, le
soir était comme une trêve mélancolique.
저기, 저기 또한, 생명들이 꺼져가던 그 요양원 주변에서, 저녁은 우울한
휴전과도 같았다.
Si près de la mort, maman devait s'y sentir libérée et prête à tout
revivre.
죽음에 그토록 가까이서, 엄마는 거기서 스스로 해방되었음을 그리고 모든
것을 다시 살 준비가 되었음을 느꼈음이 틀림없다.
Personne, personne n'avait le droit de pleurer sur elle.
아무도, 아무도 그녀 위에서 울 권리를 가지지 못했다.
Et moi aussi, je me suis senti prêt à tout revivre.
그리고 나 역시, 모든 것을 다시 살 준비가 되었음을 느꼈다.
Comme si cette grande colère m'avait purgé du mal, vidé d'espoir, devant
cette nuit chargée de signes et d'étoiles, je m'ouvrais pour la première
fois à la tendre indifférence du monde.
이 커다란 분노가 나를 악으로부터 정화하고, 희망으로부터 비워내 준 것처럼,
기호들과 별들로 가득 찬 이 밤 앞에서,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다정한 무관심에
나를 열고 있었다.
De l'éprouver si pareil à moi, si fraternel enfin, j'ai senti que j'avais
été heureux, et que je l'étais encore.
세계가 그토록 나와 닮았음을, 마침내 그토록 형제 같음을 느끼며, 나는 내가
행복했었다는 것을,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다.
Pour que tout soit consommé, pour que je me sente moins seul, il me
restait à souhaiter qu'il y ait beaucoup de spectateurs le jour de mon
exécution et qu'ils m'accueillent avec des cris de haine.
모든 것이 완성되기 위해, 내가 덜 혼자라고 느끼기 위해, 나에게 남은 것은
나의 처형 날에 많은 구경꾼이 있기를 그리고 그들이 증오의 외침들로 나를
맞아주기를 바라는 것뿐이었다.
위의 원문에서 정말 중요하고 카뮈가 이 책을 읽는 방법이라고 완전히 찍어서
쓴 부분이 있어요. 바로 마지막에서 두 번째와 세 번째 문장이에요. 이것이
바로 카뮈의 이방인 전체를 해석하기 위한 열쇠에요. 물론 소설 다른 부분에도
곳곳에 배치되어 있지만, 카뮈가 아주 친절하게 마지막에서 바로 두 번쨰와 세
번째 문장에 이렇게 읽고 이해하라고 정리를 해줬어요.
그 문장이 바로 아래 두 문장이에요.
Comme si cette grande colère m'avait purgé du mal, vidé d'espoir, devant
cette nuit chargée de signes et d'étoiles, je m'ouvrais pour la première
fois à la tendre indifférence du monde.
이 커다란 분노가 나를 악으로부터 정화하고, 희망으로부터 비워내 준 것처럼,
기호들과 별들로 가득 찬 이 밤 앞에서,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다정한 무관심에
나를 열고 있었다.
De l'éprouver si pareil à moi, si fraternel enfin, j'ai senti que j'avais
été heureux, et que je l'étais encore.
세계가 그토록 나와 닮았음을, 마침내 그토록 형제 같음을 느끼며, 나는 내가
행복했었다는 것을,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다.
여기에서 카뮈가 주는 해석의 첫 번째 열쇠는 바로 이것들이에요.
la tendre indifférence du monde. 세계의 다정한 무관심
De l'éprouver si pareil à moi 세계가 그토록 나와 닮았음을,
si fraternel enfin, 마침내 그토록 형제 같음을 느끼며,
이 세 개가 바로 해석의 열쇠에요. 이것들이 마지막에서 상당히 난해한
표현들로 지적되는 표현들이에요.
la tendre indifférence du monde. 세계의 다정한 무관심
먼저 'la tendre indifférence du monde. 세계의 다정한 무관심'
분석해봅시다. 다정한 거면 다정한 것이고, 무관심하다면 무관심하다는 건데
'다정한 무관심'이라고 해요. 이것만 보면 완벽한 모순이에요.
그렇지만 이 앞에 진행되었던 이야기들을 떠올려보세요. 사람들은 왜 뫼르소를
비난했고, 뫼르소는 뭐가 그렇게 사람들에게 불만이었을까요? 뫼르소는 분명히
사람들과 뭔가를 시도했지만 좌절당했어요. 반면 사람들 역시 뫼르소에게
무언가를 강요했으나 뫼르소에게 거부당했어요.
그러면 사람들이 주장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자신들의 삶의
의미였어요. 소설 전체에서 사람들은 분명히 뫼르소에게 매우 관심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에요. 그렇지만 사람들은 뫼르소의 본질 자체 - 뫼르소가 경험한
진실에는 관심 없어요. 모두가 제각각의 자신들의 삶의 의미로 뫼르소를
재단하고 거기에 끼워맞추려고 하며, 그에 실패하자 극도로 적대적으로 대해요.
즉, 세상은 뫼르소에게 많은 관심을 보이나 (다정한), 자신들의 삶의 의미에
뫼르소를 끼워맞추려 하고 뫼르소가 거부하자 배격해요. 뫼르소가 어떤
인간인지 본질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무관심). 세상을 자신의 삶의 의미에
맞추고 싶어한다는 거에요. 이것이 바로 세계의 다정한 무관심이에요. 세상에
관심은 많아요. 너무 많아요. 그런데 상대-더 나아가 세상이 어떤지 그 본질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이 세상이 자신의 삶의 의미에 부합하기를 원해요. 있는
그대로 본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자기 삶의 의미에 맞으면
수용, 아니면 배격, 심지어는 왜곡해서 억지로 끼워맞추려고 한다는
거에요.
De l'éprouver si pareil à moi 세계가 그토록 나와 닮았음을,
세계는 매우 다정한 무관심을 보이고 있어요. 뫼르소는 여기에서 깨달음을
얻어요. 뫼르소는 바로 세계의 다정한 무관심과 자신의 구조적 동일성을
깨달았어요. 뫼르소는 세상이 자기를 있는 그대로 봐주기를 원했어요. 그러나
자기를 있는 그대로 보지 않아서 화가 났어요. 이것을 간단히 도식화해보면
다음과 같아요.
뫼르소 : 세상이 자신의 삶의 의미에 부합하기를 원함 -> 아님 ->
분노
세상 : 뫼르소가 자신들의 삶의 의미에 부합하기를 원함 -> 아님 ->
분노
뫼르소가 추구하던 삶의 의미가 뭐든 간에 단순히 도식화해서 보면 구조가
똑같아요. 뫼르소는 세상이나 자신이나 결국 자신만의 삶의 의미에 세상이
부합하기를 원했던 거에요. 이것은 상당히 크고 중요한 깨달음이에요.
si fraternel enfin, 마침내 그토록 형제 같음을 느끼며,
이제 드디어 뫼르소는 자신과 세상이 추구하는 삶의 의미가 다를 지언정
구조적으로는 동일함을 깨우쳤어요. 그렇기 때문에 뫼르소는 자신을 분노케 한
세상에 드디어 형제 같음을 느꼈어요.
이 세 개가 중요한 이유는 뫼르소가 추구하던 삶의 의미, 그리고 어떤
인간인지에 대한 질문에 카뮈가 정확한 답을 주기 때문이에요. 도식화해서
비교한 구조적 동일성을 다시 보세요. 뫼르소는 분명히 세상이 자신의 삶의
의미에 부합하기를 원한다고 했어요. 뫼르소는 고립, 고독을 추구하는 존재가
절대 아니에요. 고립, 고독을 추구한다면 뫼르소가 신부에게 분노해야 할
이유가 없어요. 그 이전에 뫼르소는 1부에서 사람들과 계속 교류하고 있어요.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잘 놀고 잘 지내요. 외톨이가 절대 아니에요. 오히려
뫼르소는 1부에서 오는 사람 안 막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뫼르소를 고립,
고독을 추구한다고 본다면 1부의 뫼르소 행동은 해석 문제가 아니라 그 자체가
존재해서는 안 되는 모습이며, 더 나아가 뫼르소가 왜 화났는지 아무 것도 설명
못 해요.
뫼르소는 세상에 매우 관심있었고, 세상과 함께 하고 싶어해요. 그러면
뫼르소가 추구하던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바로 있는 그대로의 자신 - 자신이
경험한 것을 토대로 합리적 판단을 하는 감각적 합리주의자인 자신을 있는
그대로 봐달라는 '진실한 소통'이에요. 뫼르소는 2부 내내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봐주고 상대도 있는 그대로 답해주기를 바라는 '진실된
소통'이 부재함에 분노한 거에요.
이제 그 다음 카뮈가 소설에서 직접 제공한 두 번째 열쇠에요.
j'ai senti que j'avais été heureux, et que je l'étais encore. 나는 내가 행복했었다는 것을,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다.
이건 해석을 잘 해야 해요. 뫼르소가 과거에 자신이 행복하지 않았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행복하다고 느꼈다는 게 절대 아니에요. 과거에는 행복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잠시 자신이 행복하지 않다고 느끼고 있었어요. 마지막 문단
바로 앞 내용이 바로 교정 신부가 찾아와 신에게 귀의할 것을 강권하자,
뫼르소는 격분하며 신부의 멱살을 잡고 고함을 치는 내용이에요. 그러니 이
순간 직전까지 행복하다고 느꼈다면 그게 엉터리죠. 이거야 누구나 다 쉽게
유추할 수 있는 사실이에요.
그러면 뫼르소는 이 순간 왜 자신이 여전히 행복하다고 느꼈을까요?
이게 진짜 중요한 부분이에요. 이것까지만 풀면 거의 다 푸는 셈이기
때문이에요. 이 구절이 바로 뫼르소가 카뮈의 철학 '인간은 삶의 의미를
자신만의 신처럼 여기며 따라 살아가며,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상태-즉
부조리(허무, 무의미함)에 빠지면 자살한다. 신처럼 여기며 따라 살아가던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다면 현실에 감각적으로 충실한 자기 자신을 삶의 의미로로
삼아서 살아야 한다. 자기 자신의 실존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음을 밝히는 문장이기 때문이에요.
뫼르소는 과거에 행복했는데, 자신이 분노한 세상이나 자신이나 삶의 의미를
따라서 살고 지키고 싶어한다는 구조적 동질성을 확인했어요. 여기에서
뫼르소는 드디어 삶의 의미 상실로 인한 허무 - 부조리에서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았어요. 그것은 바로 과거에도 자신은 자기 자신에게 솔직했고, 지금도 자기
자신에게 솔직하다는 것이에요. 즉, '진실된 소통'이 부재하는 세상을 확인하며
부조리에 빠졌지만, '감각적 합리주의자 태도를 견지하는 자신' - 다르게
말하자면 '자기 자신에게 솔직한 자신'은 일관되게 유지하고 있음에 행복함을
느꼈다는 거에요.
이를 통해서 우리는 드디어 극도로 난해하기로 악명높은 마지막 문장 'Pour
que tout soit consommé, pour que je me sente moins seul, il me restait à
souhaiter qu'il y ait beaucoup de spectateurs le jour de mon exécution et
qu'ils m'accueillent avec des cris de haine. 모든 것이 완성되기 위해, 내가
덜 혼자라고 느끼기 위해, 나에게 남은 것은 나의 처형 날에 많은 구경꾼이
있기를 그리고 그들이 증오의 외침들로 나를 맞아주기를 바라는 것뿐이었다.'
문장을 제대로 해석할 수 있게 되었어요.
Pour que tout soit consommé, pour que je me sente moins seul, il me
restait à souhaiter qu'il y ait beaucoup de spectateurs le jour de mon
exécution et qu'ils m'accueillent avec des cris de haine.
이 문장은 카뮈가 이래도 모르겠다면 여기에서 아주 대놓고 알려준다고 쓴
문장과도 같아요.
Pour que tout soit consommé,
모든 것이 완성되기 위해 - 무엇을? 이 질문에 우리는 답할 수 있어요.
뫼르소가 추구하던 삶의 의미는 바로 '진실된 소통'이었고, '진실된 소통의
부재'를 깨닫고 부조리에 빠진 후 새롭게 찾은 삶의 의미란 '자기 자신에게
솔직한 자신'이에요.
pour que je me sente moins seul,
내가 덜 혼자라고 느끼기 위해 - 왜? 이 질문에 우리는 답할 수 있어요.
뫼르소는 고독, 고립을 추구하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소통을
원하는 존재에요.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과 함께하고 소통하기를 바래요.
카뮈는 대놓고 뫼르소는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어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이건 뭐 오역을 할 수도 없어요. 왜냐하면 너무 쉬우니까요.
il me restait à souhaiter qu'il y ait beaucoup de spectateurs le jour de
mon exécution
나에게 남은 것은 나의 처형 날에 많은 구경꾼이 있기를 - 아예 대놓고 많은
사람을 원한다고 말하고 있어요.
et qu'ils m'accueillent avec des cris de haine.
그들이 증오의 외침들로 나를 맞아주기를 바라는 것뿐이었다.
이제 남은 해석은 '증오의 외침들'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요. 많은 사람들의
증오의 외침이 무슨 의미를 갖고, 행복한 뫼르소를 완성하는지만 설명해낸다면
사실상 다 끝났어요.
뫼르소가 추구하던 삶의 의미가 '진실된 소통'이었고, 진실된 소통의 부재라는
부조리에 빠진 후에 '자신에게 진실한 자신'이라는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아서
이 부조리를 극복했어요. 그러면 처형날 상황을 한 번 떠올려봐요. 매우 쉽게
대중들은 뫼르소에게 '살인자'라고 비난을 할 것이며, '죽어라!'라고 외칠
거에요. 여기에서 '죽어라!'는 '우리는 너의 삶의 의미를 못 받아들이겠다' -
'우리의 삶의 의미와 너의 삶의 의미는 다르다'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어요.
그냥 죽으라는 게 아니라 법정부터 교정 신부까지의 일련의 과정에서 뫼르소는
군중의 '삶의 의미'를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했어요. 그래서 군중은 뫼르소에게
적대적이고 배격하고 분노하며, 죽으라고 외치는 거에요.
이 순간 뫼르소는 드디어 '자신에게 진실된 자신'이라는 삶의 목표와 더불어
'진실된 소통'이라는 잃어버렸던 삶의 목표도 되찾는 순간이 되요.
군중 : 너는 살인자야!
뫼르소 : 맞다. 나는 살인자다.
군중 : 너의 삶의 의미는 우리의 삶의 의미와 다르다!
뫼르소 : 맞다. 나의 삶의 의미는 너희의 삶의 의미와 다르다.
증오의 함성 속에서 뫼르소는 그렇게 갈망하던 '진실된 소통' - 모두가 솔직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완벽한 소통을 이루는 순간을 맞이해요. 이것이 그렇게
뫼르소가 간절히 원하고 추구하던 것이었으니 이 순간 뫼르소는 매우
행복해요.
또한, 여기에서 이때에서야 사람들은 뫼르소를 '살인자'라고 부르며 살인을
저지른 것에 대해 제대로 비난해요. 뫼르소는 이에 대해서 자신이 살인자임을
시인하고 그 대가가 자신의 죽음이라면 죽음으로 대가를 치르겠다고 당당히
밝혀요. 이 점도 상당히 중요해요. 이 순간 아랍인은 드디어 군중에게
'인간'으로 격상되는 순간이며, 아랍인을 '인간'으로 격상시켜서 '살인자'라
외치는 군중에게 뫼르소는 '아랍인'이라는 사람을 죽인 데에 대해 자신이
잘못했고 그 대가가 사형이라면 사형을 받아들이겠다고 대답히기 때문이에요.
만약 뫼르소가 아랍인을 사람으로 안 봤다면 이 순간 완벽한 소통은 이뤄질 수
없어요. 단순히 너와 내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너 죽어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며, 이건 뫼르소가 아무리 '기존 관념에서 벗어난 인물'이라 해도
받아들일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오히려 이런다면 뫼르소가 사실상
부조리 (삶의 의미 상실으로 인한 허무)에 패배해서 죽어버리는 자살이
되어버려요. 이는 카뮈 철학과 정면으로 충돌해요.
뫼르소에게 처형의 순간은 삶의 의미를 지키기 위한 대가에요. 이렇게 본다면
순교라고 할 수도 있어요. 물론 이 '순교'라는 표현 자체가 또 엄청난 반발을
일으킬 수는 있지만, 카뮈가 비난한 '자살'과는 아예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거에요.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으나 부조리에 대해 도피가 아니라 부조리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거에요.
자살이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거에요. 카뮈가 비난한 자살은 삶의 목적을
잃어버려서 빠진 허무 - 즉 부조리에 대한 도피이지, 자신의 올바른 신념의
대가로써 죽음을 택하는 죽음은 카뮈가 비난한 자살이 아니라는 거에요. 이게
없다면 카뮈의 철학은 '그러면 자신의 올바른 신념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은
뭐가 되냐?'는 질문에 아예 대답을 못하고 와르르 무너져버려요. 이게 웃어넘길
일이 아니라 엄청난 오해를 낳을 수 있는 문제에요. 특히 이방인은 1942년
발표작인데, 만약 이런 자신의 올바른 신념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의 죽음도
'자살' 카테고리에 들어가는데, 이를 구분하지 않으면 전장에서 목숨 걸고
싸우는 군인들은 뭐가 되냐는 비난을 피할 방법이 아예 없어요. 이건 당시 시대
상황을 고려하면 웃어넘길 일이 절대 아니며 엄청나게 무겁고 심각한
문제에요.
이렇게 해석하면 마지막이 확실히 이해가 되요. 그리고 제가 말했던 역설계
방식에서 해석에서 카뮈 철학을 그대로 복원해낼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증명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어요.
그러면 이제 카뮈 철학 속 자살의 원인인 부조리, 그리고 부조리의 극복의
흐름대로 따라간다면 어디에서 뫼르소가 완벽한 부조리에 빠진 상태가 되는지를
찾기만 하면 되요. 이건 여기까지 왔다면 매우 쉬워요. 마지막 문단 직전의
내용인 교정 신부가 찾아와 신에게 귀의할 것을 강권하자, 뫼르소는 격분하며
신부의 멱살을 잡고 고함을 치는 내용이에요.
왜 교정 신부가 찾아와서 신에게 귀의할 것을 강권했을
때 격분한 뫼르소가 부조리에 완전히 빠진 인간인가?
교정 신부가 찾아와서 뫼르소에게 신에게 귀의할 것을
강권할 때, 뫼르소는 격분했어요. 부조리에 완벽히 빠진 인간은 정신적 자살,
사회적 자살 상태에 빠지게 되요. 이건 논리를 따질 필요도 없어요. 자살하기로
마음먹은 후에 육체적 자살을 실행하지, 육체적 자살을 실행한 후에 아,
자살해야지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카뮈는 분명히 부조리에 빠지면 자살로 부조리를 회피하거나, 아니면
능동적이고 주체적이고 감각적으로 충실한 자기 자신이 중심이 되는 삶의
의미를 찾아서 극복해야 한다고 해요. 내면적 죽음에 빠지다시피 한 후, 삶의
의미를 찾으면 그 삶의 의미에 의지해서 계속 살아가는 거고, 아니면 자살로
가는 거에요.
그렇기 때문에 뫼르소는 교정 신부가 신에게 귀의할 것을 강권했을 때 완벽히
부조리에 빠지며 격분했고, 정신적 자살, 사회적 자살을 실행해요. 이로써
뫼르소에게 남은 건 이제 육체적 자살만이 남은 상태가 되요. 뫼르소는
사형수이니 직접 자살하지 않고 세상에 체념하고 좌절한 상태로 형장에
끌려가는 것만으로도 완벽한 자살이 완성되요.
이게 정신적 자살, 사회적 자살이라 보는 건 억지라고 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이 소설을 보면 이건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사실이에요. 왜냐하면 교정
신부와 대면할 때가 바로 뫼르소에게는 확률이 0에 수렴하나 0은 아닌 일말의
희망이 있었어요. 만약에 뫼르소가 그 자리에서 교정 신부 말대로 회개를 하고
참회를 한다면 교정 신부는 비록 늦었지만 잘 했다고 만족할 것이며 단두대
위에서 군중들에게 진실된 참회와 회개의 모습을 보이면 군중들이 마음을 바꿀
수도 있고, 그러면 극적인 사형 연기 및 감형이 이뤄질 수도 있어요. 일말의
가능성이나 없지는 않아요. 특히 이 소설에서 알제리의 아랍인은 당시
시대적으로 인간 취급을 못 받고 있었어요. 그래서 애초에 이 살인은 법정에서
별 거 아닌 사건으로 다뤄지는 게 일반적이었어요. 그러니 뫼르소가 만약
신부의 권유대로 회개하고 참회했다면 이런 극적 회생도 불가능하다고만 할
수는 없어요. 더욱이 공개처형이니까요.
그러나 뫼르소는 격분하며 신부의 멱살을 잡고 고함을 쳤어요. 극도로
분노하면서 바로 이 일말의 희망을 스스로 제거해요. 희망을 제거했다면 남는
건 이제 처형당하는 일 뿐이에요. 즉 자기 손으로 죽음을 완벽히 확정했어요.
이게 바로 자살 아니면 뭐겠어요. 살아날 희망을 스스로 완전히
제거했어요.
이렇게 보면 이 소설 마지막은 전형적으로 카뮈 철학 속 자살의 원인인
부조리, 그리고 부조리의 극복의 흐름대로 따라가고 있어요. 카뮈 철학을
몰라도 내용의 흐름만 카뮈가 알려준대로 보면 카뮈 철학을 그대로 따라가요.
완벽히 복원하는 수준으로요. 최소한 자신의 삶의 의미를 잃은 뫼르소가 사실상
자살을 선택하나, 그 모든 것이 사라진 그 순간에 삶의 의미를 찾고 부조리를
극복하며, 그가 원하던 진실된 소통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는 줄거리는 확실히
챙길 수 있어요.
그리고 뫼르소는 자신이 경험한 진짜를 토대로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감각적
합리주의자라고 정의할 수 있어요.
이제부터 이 카뮈가 제시한 해석으로 순서대로 쭉 분석해나가면 되요.
알베르 카뮈 이방인 시작 Aujourd'hui, maman est morte. Ou peut-être hier, je ne sais pas.
매우 단순하고 쉽지만, 세계적으로 상당히 유명한 문장이에요.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도 엄청 많아요. 게다가 번역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도 꽤 많아요.
번역 문제는 여기에서 다룰 문제가 아니에요. 그건 프랑스어 관련 문제고,
여기에서 다룰 문제는 저 문장의 의미가 뭐냐는 거에요. 최초의 이 두 문장만
보면 너무 단순해서 별 거 아닌 거 같아요. 그렇지만 이 문제가 상당히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에요. 왜냐하면 이 문장 하나 해석을 통해 파악한
뫼르소의 특징이 마지막까지 쭉 이어져요. 오죽하면 카뮈가 그래서 마지막에
답지를 아예 집어넣듯이 끝냈겠어요. 만약 첫 문장에서 해석이 틀렸다면
마지막에 이렇게 해석하라고 정답을 줄 테니 첫 문장부터 해석을 새로 하라는
거라 볼 수도 있어요.
그러면 뫼르소를 자신이 경험한 진짜를 토대로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감각적
합리주의자라고 본다면 이 첫 문장은 어떻게 봐야 할까요? 한국어로 해석하면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면 어제인가, 모르겠다'라는 이 단순한 문장을 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뫼르소의 성격 일관성을 처음부터 끝까지 유지할 수 있냐는
거에요.
첫 번째 문장은 어떻게 보면 별로 안 중요해요. 친근하게 '엄마'라고 부르며
'오늘 엄마 죽었다'라고 말한 문장이에요. 이건 딱히 문제될 건 없어요. 진짜
문제는 그 다음 문장인 'Ou peut-être hier, je ne sais pas. - 아마도
어제인가, 모르겠다'에요. 이 어머니가 언제 사망했는지 모르겠다고 하는
문장은 어떻게 자기 어머니가 사망한 날도 모르겠냐고 어마어마한 충격을
줘요.
이 문장을 감각적 합리주의자라는 관점으로 해석해 볼께요. Ou peut-être
hier, je ne sais pas - 이 문장 자체는 사실이에요. 뫼르소는 정말로 어머니가
오늘 죽었는지 어제 죽었는지 모르는 상태에요. 이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요. 그러면 왜 모르는가? 이 질문에 답하자면, 뫼르소는 어머니의 사망
자체가 엄청난 충격이었음을 의미해요.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전달받은
순간부터 소설 속에서 Aujourd'hui, maman est morte. Ou peut-être
hier, je ne sais pas.라고 말하는 순간까지 충격에 빠져서 시간 개념조차
잃어버린 상태라고 봐야 해요. 충격 때문에 단순히 '잊은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것'이라 봐아 맞아요.
뫼르소는 그러면 어머니를 안 사랑했는가? 이건 카뮈가 소설 곳곳에서 계속
뫼르소가 어머니를 사랑했다고 밝히고 있어요. 양로원에 보낸 이유도 어머니를
집에 방치하듯 놔두는 것보다 양로원에 보내는 게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말해요. 이건 1부 5장 마지막 살라마노 노인과의 대화에서 직접 'J'ai répondu,
je ne sais pas encore pourquoi, que j'ignorais jusqu'ici qu'on me jugeât
mal à cet égard, (나는 대답했다. 왜 그런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내가 이
점(어머니를 양로원에 모신 일)에 대해 지금까지 나쁘게 평가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었다고 말이다.) mais que l'asile m'avait paru une chose
naturelle puisque je n'avais pas assez d'argent pour faire garder maman.
(하지만 내가 어머니를 모실 만한 돈이 충분치 않았기 때문에, 나에게 양로원은
당연한 일처럼 느껴졌었다.) « D'ailleurs, ai-je ajouté, il y avait
longtemps qu'elle n'avait rien à me dire et qu'elle s'ennuyait toute
seule.'("게다가, 라고 나는 덧붙였다. 어머니는 나와 더 이상 할 말도
없으셨고, 혼자서 지루해하신 지도 꽤 오래되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어요.
그리고 마지막 문단에서도 Personne, personne n'avait le droit de pleurer
sur elle. (아무도, 아무도 그녀 위에서 울 권리를 가지지 못했다.)라는 문장이
있어요. 너희 멋대로 어머니를 판단하지 말라고 하고 있어요. 안 사랑하면
어머니를 어떻게 판단하든 말든 알 바겠어요. 어머니를 사랑하니까 어머니에
대해 너희들 멋대로 판단하지 말라는 거에요. 그녀를 존중해야 한다고 직접
이야기하고 있어요.
이후 장례식 및 장례식에서 돌아온 다음 날에 마리와 재회해서 해수욕과 영화
관람을 즐기고 성관계를 가지는 일련의 행동에서 뫼르소는 철저히 감각적
합리주의자 태도를 보여줘요. 어머니가 자식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어머니가 자신이 사망한 후 자식이 어떻게 되기를 원할까요? 죽도록
고통스러워하는 걸 원하겠어요, 아니면 자신이 죽은 후에도 행복하게 사는 것을
원하겠어요?
또한, 뫼르소가 관습적인 애도를 표하고 장례식에서 돌아온 후에도 한동안
침울한 상태를 유지하는 시늉이라도 하는 것이 이미 죽은 어머니와 무슨
상관인가요? 이렇게 하면 죽은 어머니가 부활하나요? 어머니는 돌아가신 후에
뫼르소가 어떤 행동을 하든 돌아가신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아요. 그러면 뭔
짓을 해도 부활하지 않는 어머니를 위해 무엇을 하는 게 맞냐는 거에요.
의미없이 슬퍼하는 시늉을 하고 고통받는 게 어머니가 원하는 자식의 모습인지,
자신에게 충실하며 삶을 계속 건강하게 이어가는 게 어머니가 원하는 자식의
모습인지 생각해보면 우리는 당연히 자신에게 충실하며 삶을 계속 건강하게
이어가는 거라고 답해요.
그래서 뫼르소는 장례식에서 관습적 애도를 표하지 않고, 장례식에서 돌아온
다음날 마리와 만나서 일상을 이어가요.
레이몽과의 만남과 편지 대필 및 거짓 증언
이것도 뫼르소가 감각적 합리주의자라는 관점으로 보면 매우 간단해요.
먼저 레이몽은 뫼르소에게 그 어떤 나쁜 짓도 안 했어요. 그러니 자신이
경험한 사실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뫼르소에게는 레이몽이 그저 평범한 한
인간이에요. 그런데 레이몽은 뫼르소와 친해지고 싶어해요. 자신에게 그 어떤
해를 끼친 적 없는 상대가 친해지고 싶다고 했으니 여기에서 어떤 반응을
보여야겠어요. 감각적 합리주의자라면 당연히 자신에게 해를 끼친 적 없는
상대가 솔직하게 친해지고 싶다고 하면 친해지는 게 맞아요. 거부할 이유가
없잖아요. 게다가 뫼르소는 고독, 고립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분명히
소통을 원하는 사람이라고 했어요.
레이몽은 그의 정부가 바람을 피웠다고 말하며, 뫼르소에게 그의 정부를
유인하는 편지를 대필해달라고 했어요. 그리고 레이몽은 그의 정부를 폭행 후
경찰 조사를 받을 때 자신에게 유리한 대로 거짓 증언해달라고 했어요. 그리고
뫼르소는 이걸 다 들어줘요.
얼핏 보면 '거짓'에 타협한 것 같아보여요. 그렇지만 한 번 더 들여다보면
이건 감각적 합리주의자인 뫼르소에게는 당연한 일이에요. 먼저 정부가 바람을
피웠어요. 바람을 피운 건 속였다는 거에요. 대놓고 '나 오늘부터 다른 남자
만날 거야. 지금 이 시간부터 나는 너와 사귀는 동시에 새롭게 찾을 다른 남자
찾아볼 거야'라고 선고하고 바람피운 게 아니잖아요. 당연히 레이몽 몰레
만났겠죠. 즉, 레이몽을 속였어요. 감각적 합리주의자인 뫼르소는 소설에서
특별히 언급하는 건 없지만, 상대가 거짓이라면 거짓으로 되갚아준다는
단순하고 명쾌한 합리적 판단을 해요. 말 그대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논리에요.
또한 거짓에 대해서 그러면 어떻게 대해야 하냐는 문제도 있어요. 상대의
거짓에 속았는데 레이몽은 아주 솔직하게 갚아줘야겠다고 하고 있어요. 거짓을
무기력하게 수용하는 게 아니라 거짓에 대해서 비록 마찬가지로 거짓을
이용하기는 하나 그 거짓에 능동적으로 그 거짓을 받아들이기를 격렬히
거부해요. 방법과 도덕적 문제를 떠나서 진실되고 능동적인 반응임은 맞아요.
오히려 거짓에 대해 적당히 넘어가거나 받아들이는 것이 감각적
합리주의자에게는 문제가 되는 상황이에요.
그래도 뭔가 찜찜한 부분이 남는 것은 사실이에요. 이 찜찜한 부분은 먼저
뫼르소는 뫼르소 기준에서 레이몽과 진실된 소통을 했고, 레이몽은 뫼르소에게
먼저 친해지자고 했으며, 뫼르소는 레이몽이 그렇게 믿고 고통스러워한다는
사실에 반응했다는 사실로 설명이 가능해요. 이렇게 보면 '감각적
합리주의자'에서 벗어나지 않아요.
이 내용이 흥미로운 점은 이것은 단지 레이몽의 복수를 돕고 유리한 진술을 해주는 부분에 한정해서 보면 윤리적으로 공격받을 수 있어요. 그러나 전체적으로 본다면 이것 하나만으로 뫼르소가 윤리를 무시하거나 윤리를 회피하는 인물이라고 절대 비난해서는 안 되요. 왜냐하면 이 행동의 원칙은 그 자신의 일에도 똑같이 엄격히 적용되기 때문이에요.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의 마지막 'Pour que tout soit consommé, pour que je me sente moins seul, il me restait à souhaiter qu'il y ait beaucoup de spectateurs le jour de mon exécution et qu'ils m'accueillent avec des cris de haine.' 이 문장에서 뫼르소가 간절히 원하는 진실한 소통이 이뤄지고 뫼르소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뫼르소는 반드시 자신이 아랍인을 죽인 살인자로써의 죄책감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했어요. 그래야 '살인자'라고 외치는 군중들에게 '맞다. 나는 살인자다'라고 답하며 진실한 소통이 이뤄지기 때문이라고 했어요. 뫼르소는 레이몽의 복수를 도와주는 논리를 자신에게도 엄격히 적용했다고 할 수 있어요. 전체적으로 보면 항상 자신의 기준이 일관되게 적용되고 있어요. 자신이 처한 아주 극단적인 상황에까지도 예외 없이 적용되고 있어요. 그러므로 단편적으로는 윤리적으로 어긋난다고 볼 수 있는 행동이 있을 수는 있으나, 전체적으로 뫼르소를 비윤리적이라 비난할 수는 없어요.
이 부분은 이 소설이 쓰인 1942년 상황과 결부시켜서 보면 마지막 남은 찜찜한
느낌도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어요. 이 시기는 2차세계대전으로, 독일의
기만에 전세계가 놀아나다가 전쟁으로 서유럽이 완전히 망했어요. 그러면 이
기만에 대해 수동적으로 당하기만 하는 게 맞냐는 질문과 겹쳐서 볼 수도
있어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논리가 마음에 안 들고, 거짓까지
동원하는 게 도덕적으로 문제가 크다고 비판할 수는 있지만, 그러면
2차세계대전 당시 거짓으로 기만하다 서유럽을 유린한 나치에게 그러면 어떻게
갚아줘야 하냐고, 그 잘난 무기력한 도덕과 대화, 평화적 해결만 찾을 거냐고
물어보면 씁쓸하지만 인정할 수 밖에 없어요.
뫼르소의 파리 지사 근무 제안 거부
이건 너무 쉬워요. 왜냐하면 나중에 마리가 파리에 가보고 싶다고 할 때
뫼르소는 대놓고 « C'est sale. Il y a des pigeons et des cours noires. Les
gens ont la peau blanche. » 라고 답해요. 더럽고 비둘기 많고, 안뜰은
어둡고, 사람들은 하얀 피부라 싫대요. 파리는 뫼르소에게 매우 마음에 안 드는
곳이었어요. 여기에서 Les gens ont la peau blanche 는 햇볕을 잘 못 쬐니까
희다는 거구요. 살기 좋은 알제가 있는데 왜 살기 나쁜 파리로 가야 하냐는
거에요. 몇 년간 있어봤는데 알제가 살기 좋다고 판단을 내린 거에요. 감각적
합리주의자다운 반응이에요.
그래도 조금 더 들어가자면, 출세하는 이유는 뭔가요?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잖아요. 파리로 간다면 출세는 하지만 정작 알제보다 잘 먹고 잘 사는 게
아니라 오히려 삶의 질이 떨어져요. 그러면 갈 이유가 없는 거죠. 잘 살지
못하기 위해 출세한다니 말이 안 되잖아요.
마리의 청혼에 대한 뫼르소의 태도
이것도 감각적 합리주의자인 뫼르소로 바라본다면 매우 간단해요.
마리가 결혼하자면 할 건가? 마리가 원한다면
마리를 사랑하는가? 아니오
다른 여자가 결혼하자고 하면 할 건가? 아마도
이 무미건조한 반응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뫼르소가 감각적
합리주의자라는 관점으로 본다면 간단해요. 먼저 뫼르소는 마리가 자신을
사랑하는 방식으로 마리를 사랑한 적은 없어요. 그러니 마리가 원하는 '마리가
원하는 방식의 사랑'에 대해서는 그렇게 사랑한 적이 없다고 솔직히 대답하는
거에요. 마리의 방식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예전부터 자신에게 의미가
없었다는 거에요. 뫼르소는 자기 방식으로 사랑하는 게 중요하지, 남의
방식으로 사랑하는 건 아무 의미 없어요.
그러면 마리가 청혼하면 뫼르소는 마리가 원한다면 받아들이겠다고 했어요.
또한 다른 여자가 청혼하면 뫼르소는 당연히 받아들일 거라고 대답했어요.
뫼르소는 결혼이 무의미하다고 봤을까요?
정답은 뫼르소에게 결혼은 분명히 의미가 있었어요. 의미없는 것이 아니에요.
한 여자가 청혼을 한다는 것은 진실한 소통의 순간이에요. 결혼하는 순간
강제적으로 함께 해야 하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거짓된 청혼을 할 수 없어요.
진심으로 당신과 영원히 함께 하고 싶다고 말하는 것에 뫼르소는 당연히
받아들이겠다고 해요. 결혼이 뫼르소에게 무의미한 게 아니라, 누구든 자신을
정말로 사랑하고 영원히 함께하고 싶어서 진실된 고백을 한다면 자기는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거에요.
그런데 마리가 원해야 마리와 결혼하죠. 마리가 청혼을 했는데 마리가 솔직히
뫼르소와의 결혼을 원해야 뫼르소도 진실된 소통을 받아들이고 기뻐하며 마리와
결혼하겠다는 거에요. 마리가 원치 않는다면 그건 자기가 원하는 결혼이
아니라는 거에요. 이후 마리가 뫼르소를 사랑하는지 자기 자신에게 물어봤고,
그에 대해 뫼르소는 아무 말도 못 했어요. 뫼르소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요.
마리의 속마음은 마리가 아는 거지 뫼르소가 어떻게 알겠어요. 뫼르소가 '응,
너는 나를 사랑해'라고 말하는 건 엄연한 거짓이에요.
그 다음이 재미있어요.
Après un autre moment de silence, elle a murmuré que j'étais bizarre,
qu'elle m'aimait sans doute à cause de cela mais que peut-être un jour je
la dégoûterais pour les mêmes raisons.
잠시 침묵이 흐른 후, 그녀는 내가 이상하다고, 아마도 그런 점 때문에 나를
사랑하는 것 같지만, 언젠가는 같은 이유로 내가 그녀를 역겹게 할지도
모른다고 중얼거렸다.
Comme je me taisais, n'ayant rien à ajouter, elle m'a pris le bras en
souriant et elle a déclaré qu'elle voulait se marier avec moi.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침묵을 지켰고,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내 팔을
잡고는 나와 결혼하고 싶다고 선언했다.
J'ai répondu que nous le ferions dès qu'elle le voudrait.
나는 그녀가 원할 때 언제든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마리는 뫼르소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느꼈어요. 그러니 뫼르소의 이런
무심해보이는 반응이 이상하기는 하나 우리는 서로를 사랑한다고 확신해요.
마리는 뫼르소와 서로 사랑한다고 느끼지만, 뫼르소의 사랑은 뭔가 사회 통념적
사랑과는 조금 다르다고 이질감을 느끼고 있어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마리가
봤을 때 뫼르소는 분명히 자기를 뜨겁게 사랑하고 있는데 정작 자기를
사랑하냐고 물어보면 모른다고 대답하는 등 일반적인 사회통념에서의
기대값과는 전혀 엉뚱한 답이 튀어나오고 있어요. '뫼르소는 분명히 나를
너무나 사랑하는 게 확실한데 왜 정작 나를 사랑하는지 모르겠다고 대답할까?'
이거에요. 마리 생각으로는 뫼르소가 자기에게 너무나 사랑하고 영원히 함께
하고 싶다고 고백하고 온갖 사랑의 표현과 사랑의 수식어로 난리가 나도
이상하지 않을 건데 뫼르소는 전혀 없다는 거에요.
서로의 사랑에 대한 진실한 소통이 이뤄지고 있기는 해요. 그러나 뫼르소가
일반인들과 뭔가 다르니까, 그게 언젠가는 극적인 대립을 야기하는 사건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느끼는 거에요. 이건 복선이자 마리의 경고에요. 진심과
그에 맞는 사회적 통념상의 표현이 있는데, 뫼르소는 이걸 전혀 안 따르고
있으니 만약 진심이 안 전해지는 순간이 온다면 진심과 따로 노는 - 심지어
사회 통념상 완전히 반대로 해석될 수 있는 표현만 남아버리니까요. 마리가
아예 모르는 게 아니에요. 지금이야 마리가 뫼르소의 진심 - 마리를 사랑하는
마음을 느끼고 있으니 뫼르소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넘어갈 수
있지만, 어느 순간 뫼르소의 진심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면 뫼르소에게 남는
건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 뿐이에요.
뫼르소는 이에 대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요. 왜냐하면 아직은 뫼르소가
부조리를 직시하기 전이에요. 이 말은 뫼르소는 나름대로 사람들과 소통하며 잘
지내고 있다고 느끼고 있는 중이라는 거에요. 그렇기 때문에 마리가 말한
뫼르소가 언젠가 그 이질감을 느끼게 하는 특징 때문에 그녀를 역겹게 할 수도
있다는 말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요. 감각적 합리주의자인 뫼르소에게 이는
자신이 경험한 사실로 대답할 수 없는 문제이니까요. 불통으로 문제가 터졌다면
조금 뭔가 느끼거나 그 말에 수긍할 수도 있겠지만, 불통으로 큰 문제가 발생한
건 아직 딱히 없는 상황이에요.
그리고 마리는 뫼르소에게 뫼르소와 결혼하고 싶다고 고백했고, 뫼르소는
그녀가 원할 때 언제든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어요. 진실된 소통의
순간이에요.
이 부분은 해석 자체가 어렵다기 보다는 워낙 마리의 질문과 청혼에
무심해보이는 답변만 유명해서 문제에요. 쭉 보면 마리가 어쨌든 진실된 소통이
되었음에 만족하고 청혼을 해요. 딱히 문제될 만한 것은 없어요.
살라마노 노인과 개
이 부분은 간단히 요약하자면 진심과 표현은 완전히 따로 놀 수 있음을
보여줘요. 그 누구보다 자신의 개를 사랑하는 살라마노 노인은 항상 자기 개를
학대해요. 주변 사람들이 보면 살라마노 노인은 자신의 개가 미워서 학대하는
거에요. 그러나 살라마노 노인은 자기 개에 대한 애정 표현이 학대까지 포함한
관심주는 행위 그 자체에요.
그래서 살라마노 노인이 개를 잃어버린 후에 뫼르소의 대화에서 둘은 의외로
쉽게 진실된 소통을 해요. 살라마노 노인은 자신의 개를 매우 사랑했음을
뫼르소에게 고백했고, 뫼르소는 이를 받아들여요. 살라마노 노인은 뫼르소가
동네에서 어머니를 요양원에 보내서 비난받는다고 알려주자 뫼르소는 자신의
어머니를 왜 요양원에 보냈는지 직접 밝혔고, 노인은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들어줘요. 뫼르소는 돈도 궁핍하고 하루종일 자신의 방에서 자기가 퇴근할
때까지 혼자이고 퇴근해도 대화도 거의 없는 어머니를 집에서 모시는 것보다
요양원에 보내드리는 게 낫다고, 어머니를 위한 판단이었음을 고백하고, 노인은
이를 수긍해요.
그런데 이 부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상당히 의미심장한 부분이 있어요.
En parlant d'elle, il l'appelait « votre pauvre mère. ».
그는 그녀에 대해 이야기할 때 "불쌍한 당신의 어머니"라고 불렀다.
Il a émis la supposition que je devais être bien malheureux depuis que maman était morte et je n'ai rien répondu.
그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내가 매우 불행할 거라고 말했지만,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Il m'a dit alors, très vite et avec un air gêné, qu'il savait que dans le quartier on m'avait mal jugé parce que j'avais mis ma mère à l'asile, mais il me connaissait et il savait que j'aimais beaucoup maman.
그러자 그는 당황한 표정으로 아주 재빨리 내가 어머니를 양로원에 보냈다는 이유로 동네에서 비난한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자신은 나를 알고 있고 내가 어머니를 매우 사랑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고 내게 말했다.
J'ai répondu, je ne sais pas encore pourquoi, que j'ignorais jusqu'ici qu'on me jugeât mal à cet égard, mais que l'asile m'avait paru une chose naturelle puisque je n'avais pas assez d'argent pour faire garder maman.
나는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내가 이 문제에 대해 비난받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으나, 어머니를 돌볼 돈이 충분하지 않았기에 정신병원에 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선택처럼 느껴졌다고 덧붙였다.
뫼르소는 레이몽과의 에피소드에서 상대가 진심으로 진실한 대화를 하면 상대방의 말을 진실이라고 받아들여요. 또한 뫼르소는 거짓말을 안 해요. 그러면 이 부분은 상당히 놀라운 상황이에요. 살라마노 노인은 뫼르소와 진실한 대화를 하고 있는 중이에요. 그런데 살라마노 노인이 뫼르소에게 'votre pauvre mère (불쌍한 당신의 어머니)'라고 불러요. 그리고 나오는 것이 바로 'il savait que dans le quartier on m'avait mal jugé parce que j'avais mis ma mère à l'asile (그는 내가 어머니를 정신병원에 보냈다는 이유로 동네에서 부당한 판단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에요.
뫼르소가 레이몽과의 에피소드에서 드러낫듯 상대가 진심으로 진실한 대화를 하면 상대방의 말을 왜곡이나 여과 없이 진실로 받아들인다고 했어요. 또한 뫼르소는 일관성이 매우 강한 사람이에요. 이럴 때는 이렇고, 저럴 때는 저렇다고 상황에 맞춰서 판단 기준을 바꾸고 변형시키는 사람이 아니에요. 즉, 'il savait que dans le quartier on m'avait mal jugé parce que j'avais mis ma mère à l'asile'라는 것은 레이몽 때와 똑같이 적용한다면 자신이 동네 사람들에게 자기가 자신의 어머니를 양로원에 보냈다는 이유로 비난당하고 있다는 것이 뫼르소에게 사실이라는 거에요.
뫼르소는 이에 대해서 'J'ai répondu, je ne sais pas encore pourquoi, que j'ignorais jusqu'ici qu'on me jugeât mal à cet égard'라고 대답해요. 거짓말을 안 하는 뫼르소이기 때문에 이 말이 거짓이 아니라고 본다면, 뫼르소는 이 사실을 이때 정말 처음 안 거에요.
처음 들은 것도 충격이고 남들이 자신에 대해 나쁘게 본다는 사실을 들었다는 것 자체가 아무리 거짓이라 해도 인간이라면 기분 상당히 상하는 일이에요. 아무리 뫼르소가 사회적 평판 따위는 정말로 신경 안 쓰는 '초월적 인물'이라고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고 쳐도 이걸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거나 무시하는 완전히 '감정이 거세된 비정상적인 인간'이라고 볼 수는 없어요. 하필이면 살라마노 노인이 자신과 진실한 대화를 하고 있다는 상황이에요. 일관된 뫼르소 성격을 고려하면 이것을 그대로 사실로 받아들여야 맞아요. 그러면 '사람들이 어머니를 양로원에 보낸 것 때문에 자신을 비난하는 것은 진실'이라고 뫼르소에게 그대로 입력되고, 이는 뫼르소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면전에서 비난당하는 거나 큰 차이가 없다고 볼 수 있어요. 즉, 상당한 충격을 가하는 말임을 알 수 있어요. 아무리 뒤에 살라마노 노인이 뫼르소가 어머니가 싫어서가 아니라 형편상, 그리고 어머니를 위해 어머니를 양로원에 보내야 했다는 뫼르소의 말을 진심으로 받아주기는 하지만요.
태양 때문에 아랍인에게 총을 발사한 뫼르소
이게 사실상 마지막이에요. 그리고 정말 문제가 되는 장면이에요. 뫼르소와
마리, 레이몽은 레이몽의 친구 마송의 별장이 있는 해변으로 놀러가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 해변을 산책하는데 레이몽의 정부의 오빠 무리에게 레이몽이
습격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어요. 이후 레이몽을 치료하기 위해 별장으로
데려간 후, 다시 해변으로 나왔을 때 아랍인 무리가 보이자 레이몽이
달려들겠다고 해요. 이때 뫼르소는 레이몽에게 총을 쏘지 말라며 총을 자기가
받아가요.
레이몽과 마송이 별장으로 돌아간 뒤, 뫼르소는 혼자 다시 해변으로 나와서
산책을 했어요. 이때부터 뫼르소는 태양이 자신을 괴롭힌다고 느끼기 시작해요.
그리고 샘터에서 쉬고 싶었지만 샘터에는 아랍인이 있었어요. 아랍인이 칼을
뽑아들자 아랍인의 칼에 반사된 빛은 뫼르소의 이마를 때렸고, 눈썹에 맺혀
있던 땀은 눈꺼풀로 흘러내려와서 눈을 가렸어요. 눈에 땀이 들어가서 앞이
제대로 안 보이는 상황에서 보이는 거라고는 자기를 공격하는 날카로운 햇빛
뿐이었어요.
이에 뫼르소는 온몸이 긴장하며 권총을 움켜쥐었고, 이 첫 발에 아랍인은
사망했어요. 이후 뫼르소는 추가로 네 발을 더 발사해요.
이 부분이 어려운 이유는 첫 문장의 해석에서 꼬이면 이 부분은 죽어도 해석할
수 없어요. 어찌저찌 맨 첫 문장과 맨 마지막 문장을 해석해내면 이 추가로
권총을 네 발 더 발사한 순간이 해석 안 되고, 추가로 권총 네 발 더 발사한
순간을 해석하면 마지막이 해석이 안 되요. 이래서 이방인 3대 난해한 파트가
이거에요. 뫼르소를 어떤 인물로 정의하는지가 이 3대 난해한 파트에서
일관되게 유지시키기만 하면 되는데, 이게 진짜 안 나온다는 거에요.
Tout mon être s'est tendu et j'ai crispé ma main sur le revolver.
나의 온 존재가 팽팽하게 긴장했고, 나는 리볼버 권총 위로 내 손을 꽉
쥐었다.
La gâchette a cédé, j'ai touché le ventre poli de la crosse et c'est là,
dans le bruit à la fois sec et assourdissant, que tout a commencé.
방아쇠가 당겨졌고, 나는 권총 손잡이의 매끄러운 배 부분을 건드렸으며,
건조하면서도 동시에 귀를 먹먹하게 하는 소음 속에서, 모든 것이 시작된 것은
바로 거기였다.
J'ai secoué la sueur et le soleil.
나는 땀과 태양을 털어버렸다.
J'ai compris que j'avais détruit l'équilibre du jour, le silence
exceptionnel d'une plage où j'avais été heureux.
나는 내가 그날의 균형과, 내가 행복했던 어느 해변의 예외적인 정적을
파괴해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Alors, j'ai tiré encore quatre fois sur un corps inerte où les balles
s'enfonçaient sans qu'il y parût.
그래서, 나는 총알들이 박혀도 흔적이 나지 않는 미동도 없는 몸 위로 다시 네
번을 쏘았다.
Et c'était comme quatre coups brefs que je frappais sur la porte du
malheur.
그리고 그것은 내가 불행의 문을 두드리는 네 번의 짧은 노크 소리와
같았다.
차라리 쉬지 않고 연속 5발 발사였다면 해석이 어렵지 않을 텐데 하필이면 첫
발 발사 후 텀을 두고 상황을 인식한 후 네 발을 추가로 더 발사했어요. 그래서
이게 어려워요. 첫 발은 사실상 모두가 다 우발적이라고 설명해요. 그러나 그
뒤에 나오는 4발은 제대로 해석을 못 해요.
카뮈는 이 상황을 인식한 후의 네 발의 추가 격발에 대해서 맨 마지막에서
힌트를 주기는 해요. 바로 제일 마지막 문장이에요.
Pour que tout soit consommé, pour que je me sente moins seul, il me
restait à souhaiter qu'il y ait beaucoup de spectateurs le jour de mon
exécution et qu'ils m'accueillent avec des cris de haine.
모든 것이 완성되기 위해, 내가 덜 혼자라고 느끼기 위해, 나에게 남은 것은
나의 처형 날에 많은 구경꾼이 있기를 그리고 그들이 증오의 외침들로 나를
맞아주기를 바라는 것뿐이었다.
군중들의 증오의 외침이 무엇일지 앞에서 다뤘어요. 크게 두 가지에요.
'살인자 죽어라!', '너는 우리와 다르다!' 이런 내용이라고 했어요. 그리고
여기에서 뫼르소가 자신이 살인이라는 큰 잘못을 저질렀으며 그에 대한 응당의
대가를 치르겠다고 해야만 완벽한 진실된 소통이 완성된다고 했어요.
이럼으로써 뫼르소는 자신의 행동에 책임지는 주체적 책임자로써
완성되구요.
힌트를 주기는 하나, 이것만으로는 사실 부족해요. 왜냐하면 뫼르소가 살인을
저질렀다는 사실은 인정하고, 그게 그 순간에 인정하는 게 아니라 살인은
저지른 순간부터 일관되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까지는 나와 있지만,
모두가 고민하는 이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은 아니기 때문이에요.
그러면 이 네 발은 대체 왜 쏜 건가?
더욱이 이 네 발을 발사한 이유는 반드시 이 소설 안에서 찾아내야만 해요.
왜냐하면 뫼르소는 계속 자신을 있는 그대로 봐달라고 하고 있어요. 이는 소설
내부에서 해결해달라는 의미에요. 그러니까 외부 논리를 가져와서 한 발 발사한
후 상황 인식 다 하고나서 또 네 발을 추가로 발사한 행위의 근본적 이유를 이
소설 안에서 찾아야 해요. 그것도 모두가 납득되도록요.
만사 귀찮으면 이후 나오는 법정에서 뫼르소가 증언한 '태양 때문에'라고
얼버무리면 되지만, 따지고 보면 이것도 답이 아니에요. 카뮈는 굳지 'J'ai
secoué la sueur et le soleil. J'ai compris que j'avais détruit l'équilibre
du jour, le silence exceptionnel d'une plage où j'avais été heureux. (나는
땀과 태양을 털어버렸다. 나는 내가 그날의 균형과, 내가 행복했던 어느 해변의
예외적인 정적을 파괴해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썼기 때문이에요. 첫 발은
진짜 누가 봐도 태양 때문이라고 쉽게 납득할 수 있지만, 이후 자신에게 순간
고통을 잃고 반사적 반응을 하며 우발적 발사하게 만든 땀과 태양에서 완전히
벗어났고 상황 인식도 했는데 네 발을 더 쏴버리기 때문이에요. 즉, 이 네 발도
태양 때문이라고 이 소설 안에서 납득되는 해석을 내놔야만 해요.
이래서 알베르 카뮈 이방인 시작 Aujourd'hui, maman est morte. Ou peut-être
hier, je ne sais pas 부터 순차적으로 분석해나가는 게 매우 위험하다는
거에요.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해석을 Aujourd'hui, maman est morte. Ou
peut-être hier, je ne sais pas부터 순서대로 했는데 해석 및 분석을 잘못해
버리면 추가 네 발 격발은 영원히 미스테리에 빠져요. 이때부터는 추가 네 발을
무시하거나, 아니면 억지로 끼워맞추거나, 그도 아니라면 마지막 해석을 사실상
포기해야 해요.
이게 웃어넘기거나 과장이 아닌 이유는 설령 뫼르소가 감각적 합리주의자라고
제대로 뫼르소의 성격을 잡았다 하더라도 Aujourd'hui, maman est morte. Ou
peut-être hier, je ne sais pas를 잘못 해석해버리면 추가 4발 발사의 이유는
미궁에 빠져버려요. 더욱이 뫼르소는 절대 여기에서 삶의 의미 상실으로 인한
허무 - 부조리와 직면해서는 안 되요. 절대 안 되요. 왜냐하면 여기에서
부조리와 직면한다면 재판 전체가 '나는 죽었다. 될 대로 되라' 이런 해석이
가능해져 버려요. 이러면 2부는 정말로 전체가 무의미해져요. 즉, 4발 발사는
살기 위한 발악이라는 해석이 도출되어야만 해요. 4발 발사가 살기 위한
발악이어야만 2부에서 뫼르소가 삶의 의미 상실로 인한 허무 - 부조리에
빠져가며 그 바닥인 사회적, 정신적 자살 상태에서 부조리를 극복하고 자신의
행동에 책임지는 주체적 책임자로 완성되기 때문이에요.
그러면 이 세계 문학에서 손꼽히는 난제를 풀어봅시다. 이 문제를 푸는 열쇠는
Aujourd'hui, maman est morte. Ou peut-être hier, je ne sais pas 여기에
있어요. 소설 전체의 마지막에서 뫼르소는 감각적 합리주의자라고 그 성격을
정의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Aujourd'hui, maman est morte. Ou peut-être hier,
je ne sais pas에서 두 번째 문장은 뫼르소가 실제로 어머니의 사망일이
언제인지 모르며, 이는 극도의 스트레스로 시간 감각을 잃어버린 상태라고
했어요.
뫼르소는 어머니의 사망이라는 사건으로 극도의 스트레스에 휩싸인 상태로
소설이 시작되요. 그리고 이 소설 1장을 쭉 보면 뫼르소에게 스트레스를 계속
가중시키는 부분이 꾸준히 등장해요.
먼저 레이몽과의 만남과 레이몽을 돕는 장면을 보면 위에서 이야기했지만
아무리 감각적 합리주의자라 해도,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설명한다 해도
뭔가 찜찜한 부분이 남는다고 했어요. 진실된 소통을 추구하는 뫼르소에게
거짓은 아무리 그게 합당하다 하더라도 좋게 받아들일 상황은 아니에요. 또한
주어진 사실만 봐도 경찰 조사 받을 때 증언하러 가는 일이 즐거운 일일 리는
없어요.
시장이 파리 지사 근무를 제안하며 출세의 기회를 주지만, 이건 뫼르소에게
기쁜 일이 아니에요. 오히려 만족스러운 알제에서의 삶을 과거 자신의 경험에
따라 판단한 불만족스러운 파리의 삶으로 바꾸지 않겠냐는 제의에요. 이 또한
뫼르소에게 유쾌할 리가 없어요.
마리가 청혼했을 때도 마찬가지에요. 마리는 뫼르소가 이상하다고 하면서 그
이상함 때문에 좋아하지만 어쩌면 그 이상함이 자신을 역겹게 만들 수 있을
거라고 말했어요. 뫼르소는 아무 말 안 했지만, 아무리 뫼르소라도 이게
웃어넘길 말은 절대 아니에요. 이건 분명히 경고로 해석할 수 있는 말이며,
뫼르소 본인에 대해 남들과 다르다고 인식시키는 말이기도 해요. 뫼르소는
진실한 소통을 원하고 아직 세상에서 진실한 소통이 가능한 세상이라 믿고
있는데 여기에 파열을 가하는 말이기 때문이에요. 크게 신경쓰지 않더라도
신경이 안 쓰였다면 그게 이상한 거에요.
살라마노 노인과의 대화도 마찬가지에요. 여기에서 뫼르소와 살라마노 노인은
사랑하는 대상을 잃은 공통점을 확인해요. 이로 끝나지 않고 살라마노 노인이
진짜 그의 개를 사랑했음을 받아들여요. 즉 아픔의 공감이에요. 그런데 이 당시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어요. 이 대화에서 뫼르소는 자신이 어머니를 양로원에 보냈다는 이유로 동네 사람들로부터 자신이 비난받고 있음을 처음 알게 되었어요.
그리고 1부 6장에서 레이몽은 아랍인에게 공격당해요. 그리고 홀로 산책을
나왔더니 이때부터 태양은 뫼르소를 공격하기 시작했어요. 평소 자신에게
온화한 대상이었던 태양이 뫼르소를 공격하기 시작한 거에요.
이렇게 보면 뫼르소는 어머니의 사망으로 인한 극단적 스트레스 상황에서
스트레스가 계속 누적되고 있는 상황이었어요. 얼핏 보면 스트레스 없이 잘
사는 거 같지만, 소설 1부를 보면 이렇게 은근히 뫼르소 신경을 긁고
스트레스를 가중시킬 만한 일들이 계속 일어나요.
그렇게 자기가 인지한다고 밝히지 않던 스트레스는 그나마 쉬려고 했던
샘터에서 아랍인이 칼을 겨누며 더욱 치솟았어요. 게다가 하필 이때 햇볕은
더욱 극도로 뜨겁고 눈은 땀이 들어가서 따갑고 칼날에 반사된 햇빛에 따가운
극도로 몰리는 상황에 빠졌어요. 그 결과 본능적으로 온몸이 긴장하며 주먹이
쥐어졌는데 총이 격발되었고, 아랍인은 즉사했어요.
상황이 진정된 후 보니 아랍인은 자신이 우발적으로 발사한 총에 맞아서 죽어
있었어요. 소설에서 이때 뫼르소의 심리에 대해 '나는 내가 그날의 균형과,
내가 행복했던 어느 해변의 예외적인 정적을 파괴해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라고 표현했어요. 자신이 살인자가 되었음을 확실히 인지하게
되었어요.
그러면 이제 왜 네 발을 더 쏘는가?
자신이 살인자가 되었음을 깨달은 뫼르소는 드디어 꾹 참던 스트레스가 한
방에 다 터져나왔어요. 간신히 스트레스를 참으며 버티고 있는 중이었는데
태양이 순간 자신을 혼란스럽게 만들었고, 살인자가 되었음을 깨달으면서 더
이상 그의 스트레스는 감당할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었어요.
그래서 뫼르소는 분노의 대상 - 자신을 이렇게 만든 이 태양과 이 상황, 이
폭발해버린 그간 누적된 모든 스트레스에 격렬히 폭발하며 저항해요. 이게 바로
총성 네 발의 이유에요. 즉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이 모든 것에 자신이
살기 위해서 분노의 공격을 가한 거에요. 이게 누적된 모든 스트레스로
해석하는 게 가능한 이유는 원문에 'C'était le même soleil que le jour où
j'avais enterré maman et, comme alors, le front surtout me faisait mal et
toutes ses veines battaient ensemble sous la peau. (어머니를 묻었던 날과
같은 태양 아래, 그때처럼 이마가 특히 욱신거렸고 피부 아래 모든 혈관이
욱신거렸다.)'가 있거든요. 어머니의 사망이 완벽히 확정되던 그 순간을 태양은
떠올리게 해요.
여기에서 뫼르소가 어디를 향해서 쐈는지는 크게 중요하지는 않아요. 그에게
있어서 그 상황 자체에 쏘는 것이며, 총알이 어디로 가든 상관 없어요. 쏟아져
내리는 햇볕, 자신이 살인자가 된 상황, 감당할 수 없는 스트레스 모든 게 다
바로 뫼르소가 있는 공간 그 자체니까요. 자신이 그날의 균형과, 내가 행복했던
어느 해변의 예외적인 정적을 파괴해버렸다는 사실은 자신이 능동적으로 저지른
일이 아니라 '수동적으로 당한 일'이기 때문에 이 일을 겪게 만든 모든 거에
자신이 살기 위해 분노의 총질을 가하는 거에요.
아랍인은 이 분노의 총질 4번의 순간에 존재하는가?
절대 없다!
인간 아랍인은 첫 발에 이미 사망했다.
감각적 합리주의자 뫼르소에게 이때부터 그 아랍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뫼르소의 자세는 여기에서도 동일하게 유지되요.
아랍인은 이미 죽었어요. 쓰러져 있는 건 살아있는 아랍인이 아니라
'아랍인이었던' 시체에요. 시체를 가만히 놔두든 총을 네 발 더 쏴버리든
달라지는 건 없어요. 이미 죽은 아랍인에게 총을 더 쏘나 안 쏘나 그 죽은
아랍인은 살아서 돌아오지 않아요. 그러니 이 순간에 인간인 아랍인은
뫼르소에게 존재하지 않아요. 살인은 이미 첫 발에서 확정되었고, 이후 네 발은
'시체'라는 '무생물'에 총을 쏜
거에요. 인간에게 발사한 것이 아니라 무생물에 발사한 거에요.
뫼르소는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자신의 소중한 균형과 정적을 깨뜨린 이 모든
거에 분노해서 자신의 소중한 것을 부순 것에 총질을 가할 뿐이에요. 살기
위해서요. 살기 위한 저항이에요.
그러면 이런 상황으로 누가 몰아갔나요? 누가 야기했나요? 바로 태양이에요.
만약 햇볕이 뫼르소를 어지럽게 안 만들었다면, 아니, 마지막으로 아랍인의
칼날에서 반사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발생했을 리가 없어요.
뫼르소가 이렇게 격렬하게 분노하고 스트레스가 폭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첫
발 이후 파악한 상황이 감당 가능한 상황이 아니어야 해요. 그래야 스트레스
폭발과 생존 본능이 다 극단적으로 터져나와요. 그러면 무엇 때문일까요? 바로
'사람'을 죽였기 때문이에요.
당연히 아랍인 누구인지 뫼르소가 어떻게 알겠어요. 서로 인사하고 아는
관계도 아니고 그날 처음 봤고, 서로 통성명을 할 기회가 아예 없었어요.
그러니 그 아랍인이 어느 집 자식이고 이름이 뭔지 알 수가 없고, 이게
당연하다. 하지만 최소한 아랍인도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어요. 살인은 엄청난
잘못이라는 것도 알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이 살인이라는 엄청난 죄에
스트레스가 폭발하고 이 상황을 만든 태양에 분노하며 극단적으로 저항하는
거에요.
카뮈는 이방인 전체 제일 마지막 문장에서 뫼르소에게 아랍인은
'인간'이었음을 알려줬어요. 그렇기 때문에 이 부분에서의 해석에서도 첫 발
발사 후 즉사한 아랍인을 보고 감당 못할 스트레스와 엄청난 죄책감을 느꼈다고
해석할 수 있어요. 이렇게 해야만 자신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벗어났을 때
왜 추가로 총을 네 발 더 발사하는지, 그 추가로 발사한 총 네 발의 의미를
찾아낼 수 있어요.
이후 2부 내내 뫼르소가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음이 나와요. 특히 이 죄책감이 직접 표현되는 대목이 2부 1장에 있어요.
Le juge s'est alors levé, comme s'il me signifiait que l'interrogatoire était terminé.
그러자 판사는 마치 심문이 끝났다는 신호를 보내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Il m'a seulement demandé du même air un peu las si je regrettais mon acte.
그는 약간 지친 표정으로 내게 내 행동을 후회하는지 물었다.
J'ai réfléchi et j'ai dit que, plutôt que du regret véritable, j'éprouvais un certain ennui.
곰곰이 생각해 보니, 진정한 후회라기보다는 오히려 일종의 지루함을 느꼈다.
뫼르소가 말한 '지루함'은 어떤 것에 대한 감각적 판단의 결과물이에요. 그 어떤 것이 바로 '죄책감'이에요. 이는 죄책감을 계속 느끼고 있다는 의미에요. 죄책감이 일시적 감정을 넘어 그의 존재 전체를 지배하는 '만성적 상태'가 되었음을 의미해요.
해변에서 울려 퍼진 나머지 네 발의 총성은 자신을 불행으로 밀어넣는 가혹한 태양(상황)에 맞서 살아남으려 했던 처절한 생존의 저항이었지만, 그 격렬한 폭발은 동시에 되돌릴 수 없는 잘못에 대한 윤리적 비명이기도 했어요. 뫼르소는 2부의 수감 생활 내내 이 저항의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며, 오히려 그 고통을 만성적인 죄책감의 형태로 온몸으로 느끼며 견뎌내요. 그에게 속죄란 관념적인 회개가 아니에요. 자신의 잘못을 직시하며 깨어 있는 감각으로 죄책감의 고통을 생생하게 느끼는 것이에요.
뫼르소에게 있어서 죄책감에 잡아먹히는 것은 속죄가 아니에요. 그리고 뫼르소가 첫 발 발사로 자신이 살인을 저질렀다는 사실에 감당 못 할 죄책감을 느꼈다고 본다면 뫼르소가 죄책감에 잡아먹히는 것의 결과는 자살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뫼르소는 속죄를 위해 끝없이 '죄책감'이란 감각에 대한 판단의 결과물인 '지루함'과 싸워야 해요.
뫼르소가 '죄책감'이란 감각에 대한 판단의 결과물인 '지루함'을 줄이기 위한 노력들은 그를 항상 고통스럽게 하는 죄책감을 조금이라도 줄이는 면에서는 무의미해요. 2부에서 직접 나오는 뫼르소의 나름의 수감생활의 불편함과 지루함에 적응하기 위한 노력이 끝나면 또 다시 끝없는 죄책감의 고통이 몰려와요. 이는 끝없이 계속되요. 마치 시지프스가 아무리 반복해서 정상까지 바위를 굴려서 올려놔도 다시 떨어지는 것처럼요.
뫼르소는 자신의 속죄를 위해 수감생활에 적응하기 위한 노력을 끝없이 지속해요. 그 순간이 의미 있어야, 행복해야 자신의 살인이라는 잘못에서 도망치지 않으며 또 그 순간이 끝난 후 끝없이 이어지는 끔찍한 죄책감의 고통을 생생하게 느끼며 버틸 수 있으니까요. 속죄할 수 있으니까요. 굴러떨어질 것을 알지만 계속 정상으로 바위를 밀어올리는 시지프스처럼요.
이렇게 보면 뫼르소가 재판에서 타인들과 원했던 '진실한 소통'이 무엇인지 매우 명확해져요. 뫼르소는 자신의 살인에 대해 용서할 수 없는 죄로 재판받고 싶었던 거에요. 자신이 사람을 죽인 행위 자체에 엄하게 비난받고, 그 원인이 태양 - 수동적이었음을 고백하고 정당한 죄의 댓가를 받고 싶었던 거에요. 살인에 대한 양심의 가책은 영원하겠지만, 그렇게 정당한 죄의 댓가를 받아야 그 양심의 가책이 조금이라도 가벼워지니까요.
즉, 첫 발 발사 후 즉사한 아랍인을 보고 감당 못할 스트레스와 엄청난 죄책감을 느꼈고, 이후 자신을 이렇게 만든 태양이 중심이 된 상황 그 자체에 격렬히 폭발하며 총질을 4번 가하며 저항했다고 해석하면 2부 내내 뫼르소는 소설 표면상 드러나는 모습과 정반대로 끝없이 죄책감에 시달리고 자신의 방식으로 반성하고 있다는 본 모습이 드러나요.
태양 때문에 아랍인에게 총을 발사한 뫼르소 부분은 추가로 두 가지 부분에서 흥미로운 점이 있어요.
먼저 항상 영원할 것 같은 것도 항상 동일하지 않다는 점이에요. 동서막론
태양은 항상 영원한 것으로 숭배되어 왔어요. 그것도 매우 좋은 의미로요.
뫼르소 또한 태양을 매우 사랑해요. 그러나 뫼르소가 사랑한 온화한 태양은
태양의 영원히 유지되고 고정된 상태가 아니에요. 이 태양이 어느 순간
자신에게 온화한 태양이 아니라 자신에게 극단적으로 적대적인 태양으로 바뀔
수 있음을 여기에서 보여줘요.
이 점을 카뮈 철학과 연결시켜 본다면 상당히 재미있어요. 긍정적 의미의
태양은 신으로 모시는 것인데, 이것조차 항상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가
아니라 어느 때는 인간을 파괴하는 존재가 된다는 점이에요. 절대적이고 영원할
거라 믿고 인생의 의미로 삼았는데 이게 갑자기 그 상태가 바뀌어서 자기를
공격하는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거에요. 이게 바로 신에게 배신당하는, 인생의
의미에 공격당하는 믿음의 파괴에요. 이때 인간은 격렬히 저항해요. 자신이
허용하는 선까지는 그것이 인생의 의미가 될 수도 있고, 소중한 것이 수도
있으나, 허용되는 선을 넘는 순간 그것은 극단적으로 적대적으로 대해야 하는
대상이 되요.
이렇게 보면 이후 재판정에서 그렇게 어머니의 죽음을 물고 늘어지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어요. 뫼르소가 뭔 짓을 하든 다 허용할 수 있다고 백만번
양보해도, '어머니에 대한 사랑'에 대한 부정만큼은 절대 용서할 수 없으며
극단적으로 적대적으로 대할 수 밖에 없다는 거에요. 뫼르소가 사랑하던 태양에
격렬히 분노하며 총질을 가한 거나 뫼르소에게 사람들이 격렬히 분노한 거나 그
구조가 같다는 거에요.
두 번째로 이 장면은 2부 마지막 장과 완전히 대비가 되는 장면이에요. 1부
마지막 장에서 뫼르소는 격렬히 분노하며 살기 위해 발악했지만, 이는 자신의
몰락을 야기했으며, 자신이 사랑하던 모든 것이 무의미하고 적대적으로 대해야
할 것으로 바뀌는 결과를 야기했어요. 태양만큼 사랑했던 알제와 알제의 사람들
모두가 뫼르소에게 무의미하고, 뫼르소와 서로 적대하는 관계까지 치달아요.
반면 2부 마지막 장에서 교정 신부와의 대면에서는 격렬히 분노하며 죽기 위해
발악했지만, 오히려 부조리의 끝을 목격하고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고
마지막까지 자기 자신으로써 사는 삶을 포기하지 말기로 결심해요.
1부에서는 살려고 발악한 게 오히려 부조리에 빠지는 원인이 되요. 2부에서는
죽으려고 발악한 게 오히려 부조리를 극복하는 원인이 되요. 1부에서의 발악과
2부에서의 발악은 완전히 정반대의 발악인데, 결과는 둘 다 뫼르소의 의도와
정반대의 결과를 낳아요. 완벽한 대비를 이루며 아이러니를 만들고
있어요.
변질된 재판
지금까지 다룬 내용은 사실상 이방인 전부를 다뤘다고 해도 무방해요. 주요 문학, 철학, 윤리, 정치, 심리 논란은 다 해결했어요. 그리고 변질된 재판 - 뫼르소의 아랍인 살인 사건 재판이 어머니 장례식장에서 사회 통념대로 슬퍼하지 않은 재판으로 변질되는 것도 다루었고, 신부와의 대화는 그 순간이 사실상의 자살임을 마지막 부분 분석할 때 다루었어요. 그러니 정말로 다 했다고 해도 딱히 틀렸다고 할 수는 없어요.
그렇지만 이 변질된 재판은 지금까지의 해석 및 분석 결과를 토대로 보면 보다 더 다르게 볼 수 있어요. 바로 이 변질된 재판이 뫼르소에게 얼마나 큰 폭력이었는지 따져볼 수 있고, 일반적으로 알려진 '어처구니 없는 상황'을 넘어선 상당히 큰 비극적 상황이었다고 읽을 수도 있어요. 그리고 이것을 다루면, 신부와의 대화가 바로 뫼르소가 부조리의 끝에 다다라서 사실상의 자살을 단행한 지점이라고 다시 한 번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어요.
뫼르소가 만성적인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는 이유는 살인이라는 감당할 수 없는 윤리-도덕적 죄악 때문이라고 했어요. 비록 그것이 태양 때문에 일어난 우발적 사건이었기는 했지만, 그 주어진 상황 속에서 방아쇠를 당긴 것은 뫼르소 그 자신이에요. 뫼르소는 이 사실에서 도망치지 않아요. 그 대가인 만성적인 죄책감, 그리고 그 죄책감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강요된 수감생활을 받아들여요. 수감생활에서 나름대로 죄책감의 결과인 '지루함'을 이기기 위해 노력하지만, 이는 죄책감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죄책감을 이겨내기 위한 노력이며, 애초에 이 노력은 수감생활의 한 부분으로 마찬가지로 강요된 것이나 다름 없어요. 소설 원래 내용과 달리 뫼르소가 수감생활에서 벗어난다고 가정하더라도 본인이 만성적인 죄책감과 함께하는 동안은 영원히 이 짓을 계속해야 해요. 시지프스처럼요.
만성적 죄책감의 원인은 윤리적 죄악에서 비롯되지만, 이를 막는 방어는 전혀 다른 윤리적 구조에 의존해요. 뫼르소가 단순히 온화한 태양, 행복하고 평화로운 일상을 그리워하는 것만으로는 윤리-도덕적 죄책감이 주는 고통을 이겨내기 어려워요. 다른 윤리-도덕적 방어로 이겨내야 해요. 이 부분에 대해서 소설에서 감옥 생활을 보면 기사들에 관심을 갖거나 아랍인 살인 사건 이전의 시절을 회상하는 것 등만 나오고, 어떤 윤리-도덕적 방어로 이겨내는지는 나오지 않아요. 그러나 이 부분 - 최소한 윤리-도덕적 방어가 아니더라도 윤리-도덕적 방어선이 무엇이었는지는 쉽게 유추 가능해요.
역설계로 이 소설 제일 마지막에서 찾는다면 단서가 되는 'Personne, personne n'avait le droit de pleurer sur elle. (누구도, 그 누구도 그녀를 위해 슬퍼할 권리가 없었다.)'라는 문장이 있어요.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에서 뫼르소가 어머니를 사랑했음에 대해서는 첫 문장의 충격과 달리 여기저기 배치되어 있어요. 즉 이 윤리-도덕적 방어는 어머니와 관련이 있을 거라고 유추해볼 수가 있어요.
뫼르소가 처음부터 이런 인간이었는지에 대한 이유는 1부 5장에 나와 있어요. 먼저 뫼르소가 처음부터 감각적 합리주의자였는지에 대해 답을 하자면 '아니오'라고 답하는 게 더 답에 가까울 거에요. 왜냐하면 아래 파리 지사 근무를 권유받는 대목에 다음과 같은 부분이 있어요.
Quand j'étais étudiant, j'avais beaucoup d'ambitions de ce genre.
내가 학생이었을 때, 나는 이런 종류의 포부를 많이 가지고 있었다.
Mais quand j'ai dû abandonner mes études, j'ai très vite compris que tout cela était sans importance réelle.
하지만 학업을 중단해야 했을 때, 이 모든 것이 사실상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그가 태생부터 감각적 합리주의자였는지는 몰라요. 하지만 이 일에서 내적으로 변화가 있었음은 확실해요.
그러면 어머니를 양로원에 보낸 이유에요. 이 또한 1부 5장에 있어요. 바로 살라마노 노인과의 대화에요.
J'ai répondu, je ne sais pas encore pourquoi, que j'ignorais jusqu'ici qu'on me jugeât mal à cet égard, mais que l'asile m'avait paru une chose naturelle puisque je n'avais pas assez d'argent pour faire garder maman.
나는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내가 이 문제에 대해 비난받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으나, 어머니를 돌볼 돈이 충분하지 않았기에 양로원에 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선택처럼 느껴졌다고 덧붙였다.
D'ailleurs, ai-je ajouté, il y avait longtemps qu'elle n'avait rien à me dire et qu'elle s'ennuyait toute seule.
"게다가," 나는 덧붙였다. "그녀는 오랫동안 나에게 할 말이 없었고, 혼자 있으니 심심해하고 있었어요."
뫼르소가 자신의 입으로 말했어요. 뫼르소가 어머니를 양로원으로 보낸 이유는 어머니를 양로원에 보내드리는 게 자신과 계속 같이 사는 것보다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에요.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니라 어머니를 위해서 그런 판단을 내린 거에요.
여기에서 뫼르소가 살인으로 인한 만성적인 죄책감에 대한 윤리-도덕적 방어는 뭐였을까요? 그것은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었다고 볼 수 있어요. 최소한 어머니를 사랑했고, 그녀를 위했다는 점이라고 유추해볼 수 있어요.
그런데 저 말에서 중요한 것이 하나 더 있어요. 뫼르소는 어머니를 양로원에 보냈지만, 어머니를 양로원으로 보내게 만든 건 누구냐는 거에요. 뫼르소가 어머니가 싫어서 어머니를 양로원으로 쫓아낸 게 아니에요. 평소에 자기 집에 놀러오든 어머니를 밖으로 부르든 어떻게라도 어머니와 어울려 주든가, 아니면 돈이라도 많이 줘서 어머니를 충분히 잘 돌볼 수 있게 해주든가요. 어머니 돌볼 돈도 충분히 준 적 없고, 어머니와 어울려 주지도 않았던 주변 환경이 뫼르소로 하여금 어머니를 양로원으로 보내게 한 거에요. 결국 어머니를 양로원으로 보내는 행동만 뫼르소가 직접 하도록 하고 상황 조성은 주변에서 한 셈이에요.
살라마노 노인과의 대화를 보면 살라마노 노인이 뫼르소에게 이렇게 말해줘요. 뫼르소가 바로 위의 말을 하기에 앞서서 살라마노 노인이 한 말이에요.
Il m'a dit alors, très vite et avec un air gêné, qu'il savait que dans le quartier on m'avait mal jugé parce que j'avais mis ma mère à l'asile, mais il me connaissait et il savait que j'aimais beaucoup maman.
그러자 그는 당황한 표정으로 아주 재빨리 내가 어머니를 양로원에 보냈다는 이유로 동네에서 비난한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자신은 나를 알고 있고 내가 어머니를 매우 사랑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고 내게 말했다.
살라마노 노인의 말을 듣고 뫼르소는 처음으로 동네 사람들이 자신을 어머니를 양로원으로 보냈다는 이유로 비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뫼르소는 진실한 소통을 하는 사람이 말하는 것은 진실로 받아들여요. 그러므로 이때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어머니를 양로원으로 보냈다고 비난하는 사실은 간접 실재(내가 직접 경험한 것은 아니나 그것은 사실이다)로 뫼르소에게 왜곡이나 여과 없이 그대로 들어왔다고 할 수 있어요.
법정에서 재판이 뫼르소가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사회통념에 따른 애도와 슬픈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재판으로 변질되었을 때, 뫼르소에게 이 장면은 어떻게 보였을까요. 뫼르소에게 이 장면은 살라마노 노인이 말해줬던 주변에서 자신에 대해 어머니를 양로원으로 보냈다고 비난하는 사실이 현실화 되어서 직접 실재(내가 직접 경험한 것은 아니나 그것은 사실이다)가 된 순간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렇지 않아도 살인으로 인한 만성적인 죄책감에 대한 윤리-도덕적 방어로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진심이었음으로 버티던 뫼르소에게 이 상황은 최후의 윤리-도덕적 방어선을 잡고 흔들어대고 격하게 공격하는 거라 할 수 있어요. 이 상황에서 뫼르소는 대응을 해야 할까요?
이 소설 맨 처음을 보면 뫼르소는 어머니의 사망에 큰 충격을 받아서 시간 개념조차 상실한 모습을 보여줬어요. 그게 그 유명한 Aujourd'hui, maman est morte. Ou peut-être hier, je ne sais pas. 에요. 별 사건이 아니라 시간 개념조차 잃어버리게 만든 거대한 사건이에요. 이후 이때에 대해서 뫼르소는 2부 1장 변호사와의 접견에서 상당히 기괴한 말을 해요. 이 장면은 다음과 같아요.
il m'a demandé si j'avais eu de la peine ce jour-là.
그는 내게 그날 슬펐냐고 물었다.
Cette question m'a beaucoup étonné et il me semblait que j'aurais été très gêne si j'avais eu à la poser.
이 질문은 나를 매우 놀라게 했고, 만약 내가 이 질문을 해야 했다면 매우 당황스러웠을 것 같았다.
J'ai répondu cependant que j'avais un peu perdu l'habitude de m'interroger et qu'il m'était difficile de le renseigner.
나는 하지만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습관을 다소 잃어버려서 그에게 정보를 제공하기가 어렵다고 대답했다.
Sans doute, j'aimais bien maman, mais cela ne voulait rien dire.
의심할 바 없이 나는 엄마를 무척 사랑했지만, 그것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았다.
Tous les êtres sains avaient plus ou moins souhaité la mort de ceux qu'ils aimaient.
모든 건강한 존재들은 그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다소간 바랐던 적이 있다.
Ici, l'avocat m'a coupé et a paru très agité.
이때 변호사가 내 말을 끊고 매우 흥분한 기색을 보였다.
Il m'a fait promettre de ne pas dire cela à l'audience, ni chez le magistrat instructeur.
그는 내게 공판에서도, 예심 판사 앞에서도 그것을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게 했다.
Cependant, je lui ai expliqué que j'avais une nature telle que mes besoins physiques dérangeaient souvent mes sentiments.
그렇지만 나는 나의 본성이 그러해서, 나의 육체적 욕구가 종종 내 감정을 방해하곤 한다고 그에게 설명했다.
Le jour où j'avais enterré maman, j'étais très fatigué et j'avais sommeil.
어머니를 묻던 날, 나는 너무 피곤하고 졸렸다.
De sorte que je ne me suis pas rendu compte de ce qui se passait.
그래서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몰랐다.
Ce que je pouvais dire à coup sur, c'est que j'aurais préféré que maman ne mourût pas.
내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엄마가 죽지 않았기를 더 바랐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여기에서 뫼르소가 말하고 싶었던 진의는 아래와 같았을 거에요.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받는 걸 보면 '차라리 편히 가셨으면...'이라고 생각해요. 이건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생각이에요. 이건 자연스러운 거예요.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너무 충격받아서 시간 감각도 없었고, 뭐가 뭔지 몰랐어요. 너무 피곤하고 잠이 와서...그만큼 충격이 컸다는 거예요. 물론 나는 엄마를 사랑했어요. 엄마가 안 돌아가셨으면 좋았을 거예요."
감정이 없는 것도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닌 상당히 이상한 말을 했어요. 하지만 분명한 것은 어머니를 사랑하고 있었고, 어떻게 보면 너무 충격적이었던 나머지 정신적 고통 대신 물리적 감각만 남는 상태에 빠져버렸다고 볼 수 있어요. 그런데 무려 '의심할 바 없이 무척 사랑했다'고 이야기했어요. 마리가 물어봤을 때는 아니라고 했는데요.
'어머니의 사망'이라는 것 자체만으로도 상당히 심각한 충격인데, 살라마노 노인이 진실한 대화 중에 동네 사람들이 뫼르소에 대해 양로원에 어머니를 보냈다는 이유로 비난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순간부터 뫼르소에게 '어머니'란 '상실로 인한 충격'에 더해서 '사회의 비난'도 중첩되어 떠오르게 되었을 거에요.
이렇게 본다면 자신이 이렇게 살인으로 고통받는 이유가 태양 때문이고, 이 태양은 하필 어머니의 장례식 때 그 뜨거운 태양이었으며, '어머니를 양로원으로 보냈다는 사회의 비난'을 강제로 같이 끄집어내는 태양이었을 거에요. 그걸로 그치지 않고 결국 칼날에 반사되어 직접 이마를 찌르고, 땀이 나게 해서 땀방울이 눈을 가리게 해서 우발적으로 온몸이 긴장하며 총을 쏘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태양이에요.
뫼르소는 법정에서 살인의 이유에 대해 '태양'이라고 말한 데에는 이렇게 보면 이유가 있어요. 방아쇠를 당긴 건 뫼르소이지만, 마치 그것이 운명인 것처럼 쏘게 만든 것은 태양이에요. 첫 발 이후 발사된 네 발 더 발사하게 만든 것 또한 태양이지만, 그 태양은 단 하나 - 그날 뜨거웠던 태양일 수도 있지만, 모든 스트레스와 윤리적 비명까지 다 합쳐서 태양일 수도 있어요.
바로 그 방아쇠를 당기게 만들던 태양 같은 상황이 바로 변질된 법정이라 볼 수 있어요. 그날 장례식에 대해 언급하는 것 자체가 힘든 뫼르소이며, 살인으로 인한 만성적인 죄책감에 대한 윤리-도덕적 방어로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진심이었음으로 버티던 뫼르소인데 바로 그 최후의 보루, 최후의 방어선 같은 윤리-도덕적 방어를 잡고 흔들고 공격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졌어요. 양로원에 보낸 건 뫼르소가 한 것이지만, 양로원에 보내야만 하는 상황까지 가도록 거들떠도 안 본 건 주변이에요. 양로원 보내지 말라고 돈을 준 것도 아니고, 뫼르소가 출근한 동안 어머니와 함께 놀아준 것도 아니면서 양로원에 보내서 장례식에서 울지 않았음을 비난하고 있어요.
뫼르소가 이 재판에서 원했던 것은 바로 자신의 살인에 대한 제대로 된 재판이었어요. 뫼르소는 현실을 직시하는 인물이며,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 인물이에요. 그래서 만성적인 정신적 고통을 받고 있는 중이에요. 자신의 살인에 대해 제대로 된 재판을 받고 자신을 괴롭히는 만성적인 정신적 고통 중 일부가 구체적인 형상으로 바뀌기를 원하고 있어요. 즉 자신이 느끼고 있는 죄의 무게에 대해서 일부라도 법정 판결에 따라 구체적인 형태를 갖고 그에 대해 대가를 치르는 것을 원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 법정은 엉뚱한 것을 놓고 뫼르소를 비난하고 판결하는 재판으로 변질되었어요. 간신히 정신을 부여잡고 있는 뫼르소에게 법정은 유일한 윤리-도덕적 방어를 잡고 흔들어대고 있는 상황이라고 볼 수 있어요. 이 상황에서 뫼르소가 할 수 있는 대응이란 이 상황 자체를 제3자의 일처럼 거리를 두며 바라보는 것이에요. 태양이 뜨거웠을 때 굳이 산책을 나가지 않았다면, 샘까지 가지 않았다면 - 그 상황에서 뭘 해보려고 하는 게 아니라 무기력하게 주저앉아버렸다면 첫 번째 총격도 없었어요. 그렇다고 딱히 뫼르소에게 대응할 기회를 주지도 않아요. 그러니 완전히 마치 남의 일인 것처럼 거리를 두는 것이 자신의 정신을 방어하는 방법이에요.
이렇게 보면 이후 신부가 뫼르소를 만나서 참회를 강요할 때 뫼르소가 왜 폭발했는지, 그것을 자살로 볼 수 있는지 깔끔히 이해할 수 있어요. 신부의 참회 강요는 아랍인에 대한 죄책감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고, 그의 마지막 윤리-도덕적 방어선인 어머니에 대한 진실한 사랑을 잡고 흔들며 무너뜨리려 하고 있거든요. 신부의 참회 강요는 어머니를 양로원에 보낸 것이 잘못이라는 인정, 어머니 장례식 때 무려 '엄청나게 슬펐는데' 슬프지 않았다고 인정 강요에요. 이걸 인정하면 뫼르소는 최후의 윤리-도덕적 보루가 무너지며 정신이 무너지게 되요. 그러니 격분한 거고, 거기에서 사회적, 심리적 자살을 감행했다고 해석할 수 있는 거에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변질된 재판이 뫼르소에게 얼마나 충격적인 폭력이었는지는 맨 마지막에 등장해요.
Pour la première fois depuis bien longtemps, j'ai pensé à maman.
오랫동안 중 처음으로,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
재판 진행에 무심한 것 같아 보이는 뫼르소였지만 그가 내적으로 심하게 상처입어가고 있었음을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어요. 재판이 진행될 수록 그의 마지막 윤리-도덕적 방어선인 '어머니'는 변질된 재판처럼 이제 떠올리기만 해도 세상의 비난과 살인의 죄책감이 동시에 몰려오는 가장 위험한 존재로 변질되려 했어요. 그래서 뫼르소는 스스로 '어머니'를 보호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의식의 심연으로 밀어 넣는 처절한 노력을 해야 했던 거에요. 그리고 신부에게 격렬히 분노하며 스스로 사회적, 심리적 자살을 단행한 후에야 더 이상 세상의 비난과 싸울 필요가 없어지며 자신을 방어할 이유가 사라지자 뫼르소는 그제야 '세상의 오염된 시선이 묻지 않은 '진짜 나의 엄마'를 다시 꺼내서 볼 수 있게 된 거에요.
이러면 더욱 그 재판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와닿을 거에요. 뫼르소는 자신이 저지른 살인에 대해 진실한 대화를 하고 그에 대해 처벌을 언도받아서 만성적인 죄책감을 조금이라도 구체적 형상화시키고 싶어했어요. 재판에서 아랍인을 죽인 것에 대한 비난은 외부에서 보면 뫼르소에게 가해지는 공격으로 보이겠지만, 자신의 죄책감을 책임지는 뫼르소는 차라리 그게 나았다는 거에요. 자신의 잘못에 대한 비난을 받으며 그 비난을 받아들임으로써 잘못에 조금이나마 속죄하며 고통에서 미약하게나마 벗어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변질된 재판은 뫼르소가 원하던 '진통제'인 살인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뫼르소의 정신적 최후 보루였던 '어머니'를 공격하고 변질시키고 무너뜨리려 하고 있었던 것이었어요.
뫼르소에게 변질된 재판의 충격은 단순히 어처구니없음을 까마득히 뛰어넘어요. 뫼르소에게 이 공간은 단순히 이상하게 변질된 재판이 사전적 의미의 부조리(이치에 맞지 않음)에 국한되지 않고, 모든 것을 무의미하고 끔찍하게 변해가던 정말 카뮈 철학 부조리(삶의 의미 상실)였던 거에요. 뫼르소가 원했던 '진실한 소통'이 존재하지 않는 공간 정도가 아니라 서로가 완벽히 소통을 닫아버리고 불통에 빠지는 공간이었어요.
결론
카뮈의 이방인은 소설 내부에서만 머무르며 해석해도 카뮈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 카뮈 철학을 읽을 수 있어요.
1부에서는 감각적 합리주의자의 모습을 보여주며, 동시에 합리적으로 보면 이게 맞는데 이게 이상하다면 그게 이상한 것 아니냐고 끝없이 불편한 질문을 제기해요.
2부에서는 감각적 합리주의자인 뫼르소가 부조리에 빠져가는 과정부터 부조리를 극복하는 과정까지 쭉 보여주고 있어요.
또한 전체적으로 보면 여러 가지 카뮈의 생각을 이야기만 쫓아가도 볼 수 있도록 하고 있어요. 만약 첫 문장 해석에 오류가 발생해서 오독할 경우 이렇게 오독하지 말라고 책 전체의 가장 마지막에 선명하게 해석의 방법을 뫼르소를 통해 밝히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제일 마지막 해석에 우선 집중하고, 이 해석으로 맞는지 맞춰나가 보는 역설계 방식이 카뮈 이방인 해석 및 분석에는 상당히 유리해요.
그리고 이러한 역설계 해석에서 역설계 해석을 제대로 했는지 판단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시지프스가 행복하다면 단두대 위 뫼르소 또한 반드시 행복해야 한다는 거에요.
이 소설의 철학적 난제와 문학적 난제를 동시에 한 번에 모두 풀어내야 하는 열쇠는 마지막에 카뮈가 직접 건네주는 해석의 열쇠를 통해 완성할 수 있어요. 그 단 하나의 열쇠란 바로 '진실한 소통'이에요.
이것이 바로 감각적 합리주의자인 뫼르소가 평생 추구한 삶의 의미에요. 뫼르소는 자신이 직접 경험한 감각적 실재를 근거로, 사회 통념이 아닌 순수한 합리성으로 판단하는 사람-감각적 합리주의자에요. 이러한 뫼르소가 평생 갈구한 것이 바로 진실한 소통이에요. 서로가 감각으로 느낀 상대의 순수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고, 거짓 없이 받아들이는 소통 말이에요.
감각적 합리주의자인 뫼르소의 삶의 의미란 바로 '진실한 소통'이었어요. 자신이 경험한 감각을 근거로, 합리적으로 판단하며, 서로를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는 소통이었어요. 이는 작품 전체에 일관되게 유지되요. 역설계를 통해 가장 마지막을 가장 처음과 이어붙여도, 또한 맨 마지막을 다른 곳들과 비교해도 뫼르소의 삶의 의미인 '감각적 합리주의에 근거한 진실된 소통'이 소설 어느 부분에서나 일관되게 유지됨을 확인할 수 있어요. 즉, 감각적 합리주의자인 뫼르소가 갈구했던 삶의 의미인 진실된 소통은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에서 작품 전체에 일관되게 중심을 이루는 강력한 뼈대이며, 뫼르소가 어떤 인물이며 무엇을 자신의 삶의 의미로 삼고 있었는지 설명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열쇠에요. 이에 따라 이 단 하나의 해석의 열쇠가 있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뫼르소, 그리고 모든 철학적 난제와 문학적 난제의 해결, 궁극적으로 철학과 문학의 합일까지 매끄럽게 한 번에 동시에 모두 해결할 수 있어요.
자기 자신을 봐달라는 뫼르소의 주장에 따라 소설에서 단 한 번도 벗어나지 않고 오직 소설 안에서 뫼르소를 직시하면서요.
따라서 알베르 카뮈 소설 이방인은 카뮈의 부조리 철학의 교과서적 구현으로, 독자가 소설 내부 논리만 따라가도 카뮈의 메시지인 반항적 행복을 깨달을 수 있어요. 카뮈는 독자들에게 가장 마지막에 해석의 열쇠들을 주며 이렇게 읽으면 자신의 철학을 이 소설에서 읽고, 소설에서 길을 헤메지 않을 거라고 뫼르소의 마지막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어요.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에서 뫼르소의 삶의 의미가 '진실한 소통'이라고 보면, 그는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인물이 되요. 표면적으로는 고립되고 고독해 보이며 무관심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누구보다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고 사람들과 어울리고 함께하고 싶어했어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봐달라고, 그렇게 본 모습을 받아들이며 진실하게 소통하고 싶어 했어요. 실제 감각적 합리주의자인 뫼르소는 고독, 고립, 허무, 무관심을 거부하며 그 누구보다도 삶의 의지가 강하고 자신의 삶에 적극적인 인물이었어요.
뫼르소는 허무주의의 아이콘이 아니에요. 뫼르소의 성격은 감각적 합리주의, 행동의 목적이자 인생의 의미는 진실된 소통이었어요. 뫼르소는 감각적으로 확인되지 않은 것들로 이뤄진 가짜 소통을 거부하며, '내가 지금 느끼는 것'이라는 확실한 감각적 실재를 긍정해요.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삶을 뜨겁게 갈구하고, 자기 존재의 실체를 단 1초도 놓치지 않으려 했던 실존주의적 반항인이에요.
이제 뫼르소는 비로소 완벽히 행복해졌어요.
시지프스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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