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과 만나서 식사를 하고 같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딱히 어디 가겠다고
정하고 걷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잡담을 나누면서 발 가는 대로 걷고 있었다.
목적지는 없었다. 그저 밤공기 쐬며 산책하고 소화 좀 시키고 싶었을 뿐이었다.
발 가는 대로 걸으며 즉흥적으로 길을 선택하며 걸어갔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있었고 걸음수도 한 걸음 두 걸음 늘어나고 있었다.
신기하지. 결국은 다니던 길로 가니까.
항상 별 생각 없이 걷다 보면 습관적으로 익숙한 길로 가게 된다. 익숙하지
않은 길로 가기 위해서는 오히려 신경을 엄청 많이 써야 한다. 길바닥만 보며
걷는 게 아니라면 별 생각 없이 걸어도 이상한 곳으로 빠지는 일은 별로 없다.
완전히 모르는 동네라면 정신 차렸을 때 이상한 곳에 도착해 있을 수 있겠지만,
최소한 잘 아는 지역이라면 그런 일이 잘 일어나지 않는다. 몸이 기억하는
것인지 무의식이 기억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딱히 생각 없이 발 가는 대로
걸으면 익숙한 길만 골라서 다니게 된다.
그래도 나름대로 익숙하지 않은 길을 찾아서 다니려고 아주 살짝 노력하기는
했다. 그래도 결국 익숙한 길이었다. 익숙한 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나마
아주 미세하게나마 익숙하지 않은 길로 가보려고 했기 때문에 익선동이 아니라
북촌으로 왔다. 만약 진짜로 별 생각없이 걸었다면 인사동을 거쳐 바로
낙원상가를 지나서 익선동으로 넘어가버렸을 거였다.
"조용하네요."
그렇게 많이 늦은 시각도 아닌데 북촌은 매우 조용했다. 북촌도 한때는 매우
트렌디하고 저녁 늦게까지 사람들이 많았던 적이 있었다. 물론 상당히 오래 전
일이다. 사회적 거리두기 이전부터 북촌은 날이 저물면 꽤 한적해졌다. 북촌이
밤까지 북적였던 때는 삼청동이 매우 핫플레이스였던 시절이었다. 삼청동보다
조금 나중에 북촌이 떴고, 삼청동이 쇠락하면서 북촌도 같이 쇠락했다.
북촌은 크게 두 지역으로 나눠서 볼 수 있는데, 하나는 북촌한옥마을이고,
다른 하나는 계동, 가회동, 삼청동 쪽이다. 지명을 보면 삼청동과 북촌은
뒤섞여 쓰이는 경우가 꽤 많이 보인다. 특히 정독도서관 쪽이 이런 현상이
심하다. 따지고 보면 삼청동, 계동, 가회동 모두 과거에는 북촌이라고 불리는
지역이었을 거다. 그러니 틀린 것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계동을
삼청동이라고 하는 건 행정구역상 틀렸지만, 삼청동을 북촌이라고 부르는 건
틀리지 않았을 거라 추측한다. 물론 대표적인 이미지가 북촌은
북촌한옥마을이고 삼청동은 카페와 레스토랑들이라 느낌이 완전히 다르지만
말이다.
지인은 가볍게 맥주 한 잔 마시고 헤어지고 싶어했다. 하지만 나는 술을 전혀
즐기지 않는다. 진짜 어쩌다가 한 번 마시는 정도다. 1년에 술을 마시는 날이
열흘 채 안 된다. 그 이전에 술을 마시고 싶다면 북촌으로 오면 안 되었다.
맥주 한 잔 하고 헤어지고 싶었다면 포장마차 거리가 있는 익선동으로 갔어야
했다.
북촌 거리는 매우 조용했다. 맥주 한 잔이 아니라 카페라도 가고 싶었지만
어두운 밤거리는 휑했고, 이미 문을 닫은 가게도 많았다.
"저기 카페 있는데 저기 갈래요?"
카페 한 곳이 영업중이었다. 카페로 다가갔다. 카페 이름은
카페공드리였다.
"여기 맥주도 파네요."
카페공드리는 카페이지만 맥주도 같이 판매하고 있는 카페였다. 맥주를 마시고
싶어하는 지인과 커피 한 잔 하고 싶어하는 내게 딱 맞는 카페였다.
카페 공드리 안으로 들어갔다.
지인은 맥주 한 잔을 주문했고, 나는 커피를 주문했다.
각자 마실 것을 주문한 후 자리에 앉아서 주변을 둘러봤다.
카페 내부는 넓은 듯 하면서 넓지 않았고, 좁은 듯 하면서 좁지 않았다.
테이블은 모두 목제 테이블이었다. 의자는 목제 의자였다. 의자 중에는 방석이
놓여 있는 의자도 있었지만, 방석이 없는 의자도 있었다.
카페 공드리는 외부에서 보면 서양의 조그만 동네 카페 같은 모습이었다. 실내
좌석과 더불어 노천 좌석도 있었다. 미세먼지가 심하지 않고 날이 춥지만
않다면 밤에 와서 한적한 계동 길거리를 바라보며 노천에서 커피 한 잔, 맥주
한 잔 해도 매우 운치있어 보였다.
실내는 좌석간 공간이 약간 협소했다. 그리고 통일된 모습은 아니었다. 약간
산만해 보일 수도 있는 실내 공간이었다. 와서 가볍게 잡담을 즐기며 맥주 한
잔 하기에 어울리는 공간 디자인이었다. 동네 주민분들이 부담없이 들어와서
가볍게 맥주 한 잔 마시고 일어나기 좋아보였다. 특히 더운 날 저녁에 들어와서
잠시 앉아 있으며 맥주 한 잔 마시며 더위를 식힌 후 일어나는 모습이 그려지는
공간이었다. 가볍게 와서 가볍게 마시고 가볍게 떠나기에 좋은 장소로
보였다.
커피 맛은 무난했다. 커피도 가볍게 한 잔 마시며 한두 시간 자리에 앉아서
떠들다 일어나기 좋은 맛이었다. 엄청나게 맛있는 커피라기 보다는 아무 생각
없이 편하게 마시기 좋은 맛이었다.
카페공드리의 최고 장점은 커피를 마시고 싶어하는 사람과 맥주를 마시고
싶어하는 사람이 같이 있을 때 가기 좋은 카페라는 점이다. 커피와 음료,
맥주를 같이 판매하는 카페이기 때문에 커피를 마시고 싶은 사람은 커피를
주문하고, 음료를 마시고 싶은 사람은 음료를 주문하고, 맥주를 주문하고 싶은
사람은 맥주를 주문해서 마시며 잡담하며 시간을 보내기 좋은 카페였다.
낮보다는 저녁에, 저녁보다는 밤에 더욱 어울리는 카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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